박성원,『하루』
86,400초. 1,440분. 24시간. 1일. 그리고 하루. 누구에게나 동등하게 주어져 있다고 하지만, 각자의 삶에서 하루의 의미는 결코 똑같지 않다. 지금 이 글을 쓰는 순간에도 누군가는 사람을 살리는, 반대로 누군가는 사람을 해치는 하루를 보내고 있다. 이처럼 세상에 다양한 하루가 있듯이 <하루(현장 비평가가 뽑은 올해의 좋은 소설 2010)>에 등장하는 주인공 역시 누구보다 특별한 하루를 보내고 있다. 그녀에게 하루 동안 일어난 사건들을 보면 신은 모든 사람에게 공평하다는 말을 꺼내지 못할 것 같다. 그녀의 하루에는 마치 누군가가 미리 설계한 것처럼 수많은 트랩들이 설치되어 있다.
모두가 바쁜 연말, 눈이 내리고 있었다. 도로 위의 사정은 그리 친절하지 못했다. 각자의 바쁜 일상으로 꽉 막히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녀에게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며칠 째 아이의 열이 내리지 않았고, 반드시 병원에 데려가야만 했다. 진작 병원에 데려갔다면 이렇게 악상황이 되지 않았겠지만, 그녀도 이렇게 될 줄 정말 몰랐다. 마찬가지로 도로 위의 운전자들도 그녀의 사정을 알리 없었다. 이윽고 간선도로에 갇혀버린 그녀는 초조해지기 시작했다. 연말이라 은행도 영업 마감을 일찍이 준비하고 있었고, 주차장에는 차들이 가득 차 있었다. 잠깐 은행에 들른 후, 곧장 아이를 병원에 데려갈 생각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그녀만의 계획일 뿐, 모든 것은 그녀의 뜻처럼 이루어지지 않았다.
아이만 홀로 남은 그녀의 차에 한 사람이 다가왔다. 그는 불법주차된 그녀의 차에 견인 고지서를 붙였다. 이 사실을 전혀 몰랐던 그녀처럼 주차단속요원 또한 그녀의 사정을 알지 못했다. 그리고 난독증이 있는 한 아이가 그녀의 차에 다가갔다. 낯선 차에 붙어있는 한 장의 종이는 아이의 흥미를 유발하는 데 충분했다. 그리고 그 호기심은 그녀의 차가 견인되는 것으로 이어졌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차 안은 보이지 않을 만큼 어둡게 선팅 되어 있었고, 견인기사는 열병을 앓고 있는 갓난아이를 볼 수 없었다. 누구의 잘못도 아니었다. 단지 모든 사람들이 게으르지 않은 하루를 보내고 있을 뿐이었다. 그녀는 사람들에게 도와달라고 호소했지만 아무도 그녀의 목소리를 들을 수 없었다. 아니. 누군가의 하루를 살필 여유가 모두에게 없었다.
결국 그녀의 아이는 차 안에서 숨을 거두었다. 간선도로에 갇힌 것, 은행 영업이 일찍 마감된 것, 난독증이 있는 아이가 견인 고지서를 가져간 것, 견인기사가 차량을 견인한 것 등 많은 사람들이 이 아이의 죽음과 관련되어 있었다. 하지만 그 누구도 아이를 죽인 범인이라고 말하기 어렵다. 마실 것 없이 고구마를 먹은 듯 가슴만 답답할 뿐이다. 이것은 아이가 죽을 수밖에 없는 운명이 아니라, 충분히 아이의 죽음을 막을 수 있는 선택들이 존재했기 때문이었다. 너무나 안타까운 일이다. 그러나 더 비통한 것은 단순히 재수 없는 하루 정도가 아니라, 이 하루로 인해 셀 수 없는 고통의 날들로 이어진다는 점이다.
우리는 때때로 비참한 하루를 보낸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우리는 이것을 해결해 줄 기적이 나타나길 기도한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반전이나 기적 따위는 거의 없다. 그래서 말 그대로 기적인 것이다. 고작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어느 날 경험했던 비참한 하루에 대해 누군가에게 이야기할 뿐이다. 간선도로에 갇힌 날, 은행이 일찍 마감한 날, 차가 견인된 날, 아이를 가슴에 묻은 날 등 비참한 하루는 스스로에게 '시련'이면서, 누군가를 이해하는 '공감', 동시에 세상을 깨닫는 '경험'이 될 뿐이다. '누군가의 하루를 이해한다면 그것은 세상을 모두 아는 것이다'라고 이 소설에 등장하는 어느 외국 소설의 광고 카피 문구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