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해'와 '오해'는 모음 하나 차이.
이야기 하나,
나는 어린 시절 이사를 많이 다녔다. 부친 직업 때문인데, 1~2년 단위로 전학 다니기 바빴다.
친구들을 사귀고 적응할만하면 새로운 곳으로 떠나야 했다. 그래서 어린 시절부터 인간관계를 만들어가는 것에 대해, 정을 주고받는 것과 관련해 '오래된', '깊은' 등의 단어는 나와 조금 멀다. 어색하고 투박하다.
성인이 되고 나서도 상황은 달라지지 않았다. 성인이 된 직후 나는 유학길에 올랐다. 처음에는 어학원을 1년 정도 다녔는데, 거기서 나는 사리카와 언이라는 아주 좋은 친구를 알게 됐다.
당시에는 언어가 서툴러 소통에 한계가 있었다. 그러나 눈빛과 바디랭귀지로 시작한 우정이어서인지 눈빛만 봐도 통할 만큼 우정의 깊이는 아주 깊었다. 하지만 이들과도 오래 함께 하지 못했다. 1년짜리 어학원 코스가 끝이 나자 사리카는 다시 일본으로, 언은 대학원 진학을 위해 영국으로 떠났다.
나만 뉴질랜드에 혼자 남게 됐다. 만 19살, 가족이나 지인 없이 홀로 시작한 출발이었기 때문에 당시 의지하던 두 친구가 떠나는 게 슬펐다. 친구들 역시 나를 걱정했다.
이런 식이 었다. 내 인간관계는 상황에 의해 아주 짧고, 단순한, 깊지 않은 그런.
이야기 둘,
5~6년간의 짧다면 짧은, 길다면 긴 유학생활을 마쳤다. 사실 유학 생활에 만족했고, 그곳에서 정착해 살까도 생각했지만, 나는 계획에 따라 움직였다. 대학교 학과 선택에서 회계학과와 언어 관련 학과 사이 선택지가 있었다. 당시 나는 회계학에 높은 점수를 보유하고 있어 진학 상담 과정에서 회계학을 추천받았다. 물론 offer도 나왔고. 하지만 나는 언어 관련 학과로 갔다.
이유는 내가 그렇게 정해서였다. 나는 어린 시절부터 확고하게, 늘 바라던 게 있었다.
하나, 언론인이 되는 것.
둘, 남을 도우며 살 수 있는 사람이 되는 것.
셋, 부모님과 멀지 않은 곳에서 가족과 함께 사는 것.
넷,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과 좋은 집을 지어 행복하게 사는 것.
나는 늘 뚜렷한 목표가 있었고, 큰 범위의 계획을 가진 사람이었다. 대신 그 안에서 벌어질 일들에 대해서는 구체적인 계획을 일부러 만들지 않았다. 어차피 틀어지고 좌절하는 등 여러 상황이 생길 것을 경험에 의해 알고 있어서였다. 나는 완벽하지 않은 사람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 그리고 친구들과 함께 하고 싶었지만, 상황 때문에 여러 이사를 다니는 동안 포기할 수밖에 없는 건 포기할 줄 아는 사람이 돼 있었다.
이야기 셋,
나는 대학 생활 동안 어떤 과목에서도 fail을 받은 적이 없다. 솔직히 많이 힘들었다. 예를 들어 우리 학교는 교수의 lecture을 듣고, 세부적으로 반이 나뉘어 tutor와 같은 반으로 배정된 학우들과 소통하면서 배운 내용을 심화 학습하는 식으로 강의가 진행됐었다.
처음 정치학이나 커뮤니케이션 수업을 들었을 때 나름 엘리트 친구들이 모인 곳에서 살아남으려고 울며 공부했던 노력의 기억이 있다. 나름 정치에 관심이 있는 엘리트에 원어민 학우들과 같은 강의실에 앉아 수업을 따라기에는 나는 조금 '병아리'였다. 수업 내용에 정치와 관련한 terminologies를 이해하고 알아가는 건 '이중 공부'같았다. 외국인, 1년짜리 어학연수 수료증/foundation 졸업. 그게 나였다. 하지만 fail 없이 나는 pass 했다. 나름 양호한 성적으로. 학교를 제때 졸업한다는 게 대단한 건 아니지만, 열심히 목표를 위해 지냈던 당시 나 자신에게 무한한 칭찬을 하고 싶다.
그 배경에는 계획한 것을 이루고 싶다는 의지, 학비에 달에 n백만 원의 용돈을 보내주며 뒷바라지해 주는 부모님에 대한 고마움, 나와 같은 나이인 친구들보다 조금 늦게 대학에 진학했다는 열등감, 나는 잘할 수 있다는 믿음 등이 있다.
이야기 넷,
한국에 돌아왔다. 기말고사를 마치고 한국에 입국해 2~3개월 정도를 쉬었다.
그러던 중 나는 기자가 됐다. 지역의 작은 언론사였는데, 처음에는 솔직히 '체험'의 느낌으로 한 도전이었다. 기자라는 직업에 대해 알고 싶었고, 후에 있을 graduation ceremony에 참석하기 위한 비행기 값도 내가 벌고 싶었다. 이왕이면 내가 하고 싶던 일인 기자를 통해 돈을 벌고 싶었다.
내 고향에서 시작한 기자 일은 나름대로 재밌었다. 하지만 직업적으로 성장하기에는 동네가 조용한 편이었다. 고민이 들 때 즈음 외할머니가 돌아가셨다.
유년시절 5~7살 때였나. 나는 외할머니 댁에 맡겨져 자랐다. 동생이 두드러기, 교통사고 등 병치레를 하면서 모친은 병원에서 동생 병간호를 하셨고, 부친은 일을 하시느라 떨어져 있었다. 외할머니는 늘 나와 친구가 돼주시려고 노력했지만, 직장 생활을 하고 계셨던 터라 나는 주로 혼자 보내는 시간이 많았다. 당시 나는 외할머니가 해준 생채를 참 좋아라 했었다. 사실 그 나이 때 매운 생채를 좋아할 나이는 아닌데, 돌이켜 보면 나는 생채를 좋아한 게 아니라, 생채를 잘 먹는 나를 보며 좋아하는 외할머니 모습이 좋아서 맛있게 먹었던 거 같다.
학창 시절에는 워낙 전학을 많이 다니고 거리가 있다는 핑계로 외할머니를 찾아뵙지 못했다. 그런데 유학 생활 마치고 한국에 돌아와 외할머니와 같은 지역에 거주하는데도, 나는 외할머니를 찾아뵙지 '않았다'. 일이 바쁘다는 핑계였다. 외할머니는 내가 방학기간 잠깐 한국에 왔을 때 뇌졸중으로 쓰러져 신체 반이 마비가 된 상태로 1~2년을 집에서 보내셨다. 하지만 나는 많이 찾아뵙지 않았다. 할머니가 돌아가시고 나서 너무나 큰 후회를 했다.
나라는 생물체가 맺은 인간관계 중 가장 오래되면서 지속적으로 보는 건 '가족'이었다. 짧은 인생 중 수년을 함께 살고 나를 예뻐해 준 외할머니를 나는 고작 보도자료 몇 개 올리면서 바쁘다는 핑계로 뒷전으로 했다. 가족을 특별하게 생각한다고 믿었던 나 자신에 대해 크게 미쳤다고 생각했다. 나 자신에 대해 자기 객관화가 덜 된, 혐오스러운 사람이라고 생각하며 지속적으로 채찍질하고 미워했다.
여러 생각에 힘들어하던 때, 몸이 아파왔다. 맹장 수술을 하고 불면증에 시달리고, 우울감도 있었다. 내가 원하는 건 이런 게 아니라는 생각이 많이 들었다. 선택을 다시 해보자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첫 직장에서 퇴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