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eat. 지금 시작하는 자화상
"나는 누구인가?"라는 물음에 스스로 답하지 않으면 세상의 반응에만 의존하게 될 것이다. - 칼 구스타프 융
나는 그림을 정말 못 그린다. 어렸을 적에 미술학원에 다니고 싶어서 엄마 손잡고 미술학원에 갔는데, 원장님께서 대뜸 "비행기"를 그려보라고 하셔서 그렸다. 그리고 그 이후에 엄마는 나를 그곳에 보내지 않았다. 예상컨대 그 원장님께서 나의 그림을 보시고는 그림을 그리지 않는 게 좋겠다는 말씀을 하셨을 거다. 그게 아니라면, 우리 엄마가 말렸을 리가 없지 않은가.
아직까지도 그날이 생생하게 기억이 난다. 비행기를 마치 "새"처럼 그렸고, 색감도 엉망, 선도 엉망, 모든 게 엉망이었다. 그래서 나는 미술 쪽은 과감하게 포기했다. 아니, 포기 "당했다"라고 말하는 게 맞겠다. 그 뒤부터는 그림을 잘 그리려 노력도 하지 않았고, 미술 수업에서 A+을 받는 건 언감생심 꿈에도 생각하지 않았다. 이 때문에 가장 선망하게 된 사람들 역시 <미술> 쪽에 종사하는 분들이다. 내가 가지지 못한 것을 가진 분들을 동경하는 건 언제나 즐겁다.
그런 뜻에서 오은정의 <지금 시작하는 자화상>은 나를 그리는 것을 시작으로 미술에 대한 흥미를 일깨워준 책이다. <자화상>이라는 단어가 가져다주는 따스함, 그리고 내가 나를 그린다는 것이 얼마나 재밌는 일인지 알게 되었고, 중요한 건 그림을 잘 그리느냐 혹은 못 그리느냐의 여부가 아니라 그릴 마음이 있는가, 였으니.
책은 총 5파트로 나뉘어 있다.
1. 시작, 자화상
2. 내가 남을 볼 때
3. 내가 나를 볼 때
4. 다시, 자화상
5. 본격 인물화 그리기
"내 얼굴을 그려본다는 건, 생략되고 누락된 과정을 재생시키는 것과 같다. 그 과정에서 시간도 걸리고 부정하고픈 흉터도 발견하겠지만 그런 나를 찬찬히 대면하면서 무언가 밝아짐을 느낀다. 그 빛을 따라가다 보면 그간 희미하게 보이지 않던 나만의 진짜 얼굴도 발견할 수 있다." P.20
- 돌이켜보니 <자화상>이라는 단어가 가진 의미가 다양하다. 그리고 왜 살면서 다른 낙서와 그림은 혼자 잘도 그렸으면서 정작 나 자신을 그려볼 생각은 못했는지. 더 깊이 들어가 보면, 내 두 눈으로 세상을 많이 보려고는 노력을 많이 했다만, 내 모습을 뚫어지게 바라봤던 적은 없다. 준비할 때, 화장할 때 어쩔 수 없이 거울을 통해 비치는 나를 잠시 봤을 뿐. 그래서 <자화상>을 그려보는 것을 통해 진정한 나의 모습을 마주하고 나의 내면을 들여다보는 시간을 가져봐야겠다는 생각을 해본다. 그게 언제가 될지는 모르겠지만.
"지금 내가 무엇을 원하는지 알 수 있다면, 내 기분이 어떤지 확실히 인지할 수 있다면 누구든 백지를 그냥 둘 수 없다. 백지를 대하는 자세는 곧 내가 채우고 싶은 삶일 테니." P.29
- 삶은 백지를 채워가는 여정이라는 말이 마음속에 남는다. 항상 삶에는 무언가가 있다고 생각했고, 시작이 0 아닌 1이라고 생각해왔다. 하지만 삶을 백지에서부터 시작하는 것이라 생각하고 내가 원하는 것을 이루고자 하는 마음으로 살아보는 건 어떨까. 아무것도 없이 시작하는 만큼 시작이 더 과감하지 않을까. 잃을 것이 없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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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진심으로 나를 그려보고 싶은 분들께 추천드린다. 생각보다 나를 그린 다는 것은 그 이상이다. 나를 그리고자 한다면 긴 시간 동안 나를 마주한다는 뜻이고, 그 속에서 미처 알지 못했던 나를 알게 되는 여정에 발을 들인다는 뜻이 될 테니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