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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황여울 Jul 08. 2024

늦은 밤, 갑자기 정전이 되었다

잠깐의 불편함, 잠깐의 낭만


밤 10시, “띠딕” 소리와 함께 순식간에 집 안이 어둠에 잠겼다. 전등이 꺼지고, 사용 중이던 노트북도 꺼졌으며, 에어컨과 냉장고, 냉동고도 “삐빅” 소리를 내며 작동을 멈췄다. 휴대폰을 제외한 전자기기와 가전제품이 모두 제 역할을 못하면서 실내는 불빛 하나 없이 완전히 깜깜해졌다.


휴대폰의 손전등을 켜고 거실로 나가니, 방에 있던 아이들도 나왔다. 나는 아들에게 창고로 가서 차단기를 점검해 보라고 했다. 여러 스위치 중 내려간 스위치가 있는지, 있다면 어느 스위치인지 살펴보라고 했다. 아들은 차단기에는 아무 문제가 없다고 했다. 그래도 혹시 몰라 나도 다시 확인해 보았다. 모든 스위치는 제대로 올라가 있었다.


창밖을 내다보니 맞은편 동에는 불이 켜져 있었다. 우리 동만의 문제인 것 같았다. 꼭 닫아 둔 창문을 열고 고개를 빼꼼히 내밀었다. 옆집도 정전이 되어 깜깜했다. 아이들과 함께 창문에 나란히 붙어 서서 아래층 위층을 살펴보았다. 자세히는 보이지 않았지만 우리 동에 불 켜진 집은 없는 것 같았다.


관리사무소에는 직원이 없을 시간이라 경비실로 전화했다. 통화 중이라는 음성 메시지만 들리고 연결이 되지 않았다. 이웃 주민들이 경비실로 연락한 게 분명했다. 다시 한번 창밖을 내다보는데 옆집에 사는 이웃과 눈이 마주쳤다. 대화를 하기에는 먼 거리라 서로 수신호를 했다. 팔로 엑스자를 만들어 보였더니, 이웃은 손을 좌우로 돌려가며 흔들었다. 10층에 거주하는 이웃과도 눈이 마주쳤다. 이웃은 아래로 내려다보며 우리에게 손으로 엑스 형태의 제스처를 취했다. 우리도 손을 좌우로 돌려가며 흔들었다.


이미 신고가 된 것 같고, 우리 집만의 문제가 아닌 게 확인되었으니, 일단 기다려 보기로 했다. 모두 소파에 앉았다. 집 안에 남아 있던 냉기가 점점 사라지고 후끈한 더위가 느껴지기 시작했다.


“엄마, 너무 덥지요?”

“응. 너무 덥네. 밖에 바람 한 점 없는 것 같아.”


그 사이 기술자들이 왔는지 “땡”하고 엘리베이터가 멈추는 소리가 간간이 들리고, 아래층에서 웅웅거리는 목소리도 들렸다. 정전 중에도 비상 전원 시스템으로 엘리베이터가 멈추지 않고 정상적으로 작동되는 것 같아 안심이 되었다.


“엄마, 와이파이도 사용 못하는 거 알지요?”

“아, 그렇지. 와이파이 공유기를 전원 콘센트에 꽂아야 작동하니까.”


전기가 나가 버리니 모든 게 멈췄다. 집이 어두워서 불을 밝히고 싶어도 전기 없이 작동되는 게 아무것도 없었다. 가끔 사용하던 향초도 눈에 보이지 않았다. 핸드폰 손전등 불빛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 딸은 화장실에 가고 싶다고 했다. 핸드폰 손전등을 켜고 들어가라고 했지만 너무 어두워서 문을 닫기가 무섭다고 했다. 조금 참아보겠다고 했다. 아이패드를 열고 다운로드해 둔 책이라도 읽으려 했지만 화면 밝기를 조절해도 눈이 부셔 책을 읽기가 불편했다. 휴대폰에서 레인보우 라디오 앱을 열었다. 모바일 데이터를 사용할 수 있으니 그나마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잔잔한 음악이 흐르자 분위기가 한결 편안해졌다.


소파에 누워 눈을 감고 있으니 옛 생각이 떠올랐다. 1970년대, 내가 유치원과 국민학교를 다니던 시절에는 곧잘 정전이 되었다. 저녁밥을 먹고 있다가 정전이 되기도 하고, 숙제를 하다가 정전이 되기도 했다. 엄마는 늘 부엌에 하얀색 길쭉한 기도용  한 박스와 팔각형 성냥갑을 구비해 놓으셨고, 정전이 되면  두 개를 꺼내 불을 밝히셨다. 성냥갑 옆면에 성냥개비 머리 부분을 “쓱”하고 긁으면 불이 붙었다. 하얀색 양초의 심지에 불붙은 성냥개비를 대면 캄캄했던 방에 작은 빛이 생겼다. 엄마는 양초를 기울여 밥상 양쪽에 촛농을 떨어뜨려 양초를 하나씩 고정하셨다.


저녁을 먹다가 정전이 되면 마치 작은 파티를 하는 느낌이 들다. 촛불로 밝혀진 밥상은 마치 동화책 속 공주님의 식탁처럼 느껴졌다. 하얀 형광등 불빛이 사라지고 따뜻한 노란빛으로 바뀌었다. 촛농이 뚝뚝 떨어지며 초가 서서히 타 들어가는 모습을 보는 것이 재미있었다. 그러다 어느 순간 전기가 들어와 형광등이 다시 켜지면 나만의 작은 파티가 끝난 듯한 아쉬움이 밀려왔다. 어린 시절의 나에게 정전은 불편함이 아니라 잠깐 동안의 낭만이었다.


이제는 낭만은 사라지고 불편함만 남았다. 잠깐의 더위도 참기 힘들었다. 배터리로 작동되는 손선풍기라도 사뒀어야 했다. 그동안 전기의 소중함을 모르고 살았던 것 같다. 에어컨, 선풍기, 노트북, 텔레비전, 오디오, 냉장고 등 거의 모든 가전제품과 전자기기가 전기 없이는 작동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잊고 있었다. 게다가 우리 아파트는 각 가정마다 전기온수기가 설치되어 있어서 정전이 되면 온수도 사용할 수 없다. 전에 참 많이 의존하고 살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시간은 흘러 어느덧 밤 10시 반이 되었다. 무슨 큰 문제가 발생한 것인지, 정전된 지 이미 30분이 지났는데도 전기가 복구되지 않았다. 너무 더워 온도를 확인해 보니 늦은 밤임에도 불구하고 섭씨 29도였다. 에어컨이나 선풍기를 켤 수 없어 답답함이 더해졌다. “띠딕” 소리와 함께 전등이 세 차례 꺼졌다 켜졌다를 반복했다. 차단기가 계속 내려가는 것 같았다.


5분쯤 흘렀을까. 마침내 전기가 들어왔다. 순식간에 모든 가전제품과 전자기기들이 다시 작동하기 시작했다. 전등이 켜져 집이 밝아지고, 에어컨이 작동하여 시원한 바람이 나오기 시작했고, 냉장고와 냉동고는 “위잉” 소리를 내며 전원이 들어왔음을 알렸다. 노트북과 모니터도 켜졌고, 스탠드 불도 켜졌다. 핸드폰에 와이파이 작동 중임을 나타내는 표시가 떴다. 딸은 화장실 불을 켜고 들어갔다.


전기가 복구되면서 다시 일상으로 돌아왔다. 예기치 못한 정전을 겪으며 평소 우리가 얼마나 많은 전기를 사용하고 있는지, 그리고 전기가 없을 때 얼마나 많은 일상의 편리함이 사라지는지를 실감할 수 있었다. 하지만 잠깐 동안의 불편함은 어린 시절의 추억을 회상하는 행복감을 안겨 주었다. 그저 아무 무늬도 없는 하얀 양초에 촛불을 켰을 뿐인데, 둥근 밥상이 너무나 근사하게 보였던 그 어린 시절의 내가 그리웠다. 







사진 출처: Unsplash by Paul Torr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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