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는 오늘 또 방문을 닫아놓으시겠지
단풍이 아름답게 물든 한국의 가을, 오랜만에 다시 느껴 본 가을 하늘과 바람이 정말 좋았다. 우수수 떨어진 낙엽도, 울긋불긋한 단풍도 그림처럼 아름다웠다.
얼마 전 양치질을 하다 치실을 사용하던 중, 송곳니 표면에 살짝 금이 간 듯한 것이 보였다. 돋보기안경을 끼고 자세히 들여다보니 미세한 균열처럼 보였다. 손끝으로 만져봤을 때는 매끈하게 느껴져 확신할 수 없었지만, 사진을 찍어 확대해 보니 균열이 선명하게 드러났다. 이곳에서 치료받기보다는 한국에서 받는 게 여러모로 나을 것 같았다. 치과 진료를 받고 부모님도 뵐 겸 한국행 비행기표를 예매했다.
예기치 않은 딸의 방문 소식에 부모님은 무척 기뻐하셨다. 비행기표를 예매하고 나니 나 또한 가고 싶은 마음이 더 커졌다. 치과 진료가 목적이긴 했지만, 부모님과 함께 지낼 수 있다는 생각에 마음이 무척 설렜다.
인천공항에 내려 기차를 타고 동대구역으로 갔다. 택시로 15분쯤 가면 친정에 도착한다. 공동현관문을 열고 엘리베이터에 올라 14층을 눌렀다. 트렁크를 끌고 오느라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거울을 보며 매만졌다. 5층, 6층, 7층… 층수가 올라갈수록 내 마음도 쿵닥쿵닥 더 빠르게 뛰었다. 엄마, 아빠를 볼 생각에 가슴이 두근거렸다. 14층에 도착해 ‘땡’하는 소리와 함께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다. 그런데 그 앞에, 어떻게 알고 나오셨는지 엄마가 서 계셨다.
“엄마, 나 오는 거 어떻게 알고 여기 서 있었어요? 택시 탔다고 전화도 안 했는데.”
“기차 도착 시간에 택시 타고 오는 시간까지 계산해서, 아까부터 나왔다 들어갔다 하면서 기다렸지.”
“아이고 엄마는… 뭐 하러 힘들게 왔다 갔다 하셨어요.”라고 말하며 서둘러 집으로 들어갔다.
현관에는 아빠가 나와 계셨다.
“아빠! 잘 계셨어요?”하며 반갑게 안아드렸다.
트렁크 바퀴를 물휴지로 닦은 후 내가 묵을 방으로 갔다. 언제나 그러셨듯 푹신한 이불을 깔아놓고 커다란 제사상을 꺼내 펴놓으셨다. 내가 책상을 좋아하는 걸 아시니, 매번 번거로운데도 꼭 꺼내 주신다.
손을 씻고 거실로 나가보니 부엌에서 맛있는 냄새가 올라왔다. 꽃게조림이었다. 내가 정말 좋아하는 음식이다. 싱가포르에서도 비슷한 게를 구할 수는 있지만, 생물이 아니라 비린내가 나서 잘 먹지 않는다. 엄마표 꽃게조림은 양념을 연하게 해 재료 본연의 감칠맛이 살아 있어 좋다. 이로 야무지게 발라 먹고 싶었지만 송곳니가 신경 쓰여, 손으로 살을 최대한 발라 먹었다. 싱싱한 꽃게의 단맛, 삼삼한 국물, 양념이 배어 살캉거리는 무까지… 홀린 듯 꽃게 두 마리를 모두 먹어치웠다.
부모님과 오랜만에 만나니 할 얘기가 참 많았다. 아무리 보이스톡으로 안부를 주고받아도, 얼굴을 마주 보고 나누는 대화와는 비교할 수가 없다. 밤 10시면 주무시는 부모님이 11시가 다 되도록 소파에 앉아 계셨다. 내가 일어서자 그제야 방으로 들어가셨다.
방으로 들어오니 바닥이 따끈했다. 더운 나라에서 온 내가 혹시라도 감기에 걸릴까 봐 엄마가 온도를 높여두신 듯했다. 난방을 끄고 창문을 열어 찬 공기를 잠시 들였다가 다시 닫았다.
다음 날 치과에 갔다. 어릴 적 친구가 진료를 봐주니 믿음이 가고 마음이 한결 편안했다. 엑스레이를 찍고 검사해 보니 신경치료에 크라운까지 해야 할 정도였다. 친구가 최대한 내 편의를 봐준다고 했지만, 싱가포르로 돌아가는 날짜까지 치료를 끝내기에는 매우 촉박해 보였다. 고민 끝에 비행기표를 며칠 뒤로 변경했다. 수수료를 물어야 했지만 마음이 급한 것보다는 나을 것 같았다.
치과에 다니는 중간중간 시간을 내어 부모님과 함께 외출했다. 엄마와 서문시장에도 가고 동성로에도 다녀왔다. 평소에는 기운이 달려 많이 다니지 않으시는데, 내가 오면 함께 다니는 재미에 잠시라도 나서신다.
엄마, 아빠가 정기적으로 다니시는 병원에도 함께 가서 의사 선생님의 설명을 들었다. 종종 외식도 했다. 아빠가 좋아하시는 고깃집과 죽집, 엄마가 주문하기 어려워 못 드신다는 맥도널드 아침세트 ‘맥모닝’도 함께 먹었다. 호떡, 어묵꼬치, 붕어빵, 아이스크림… 같이 먹는 즐거움이 컸다. 안 드신다며 손사래 치시면서도 결국엔 잘 드셨다.
하루하루 그렇게 지내다 보니 어느새 치아 치료가 끝났다. 열흘이 금세 흘렀다. 트렁크에 차곡차곡 짐을 넣고 있으니 엄마, 아빠가 번갈아 가며 들여다보셨다. “참 야무지게도 짐을 싼다.” 하시며 흐뭇해하셨다. 부모님 눈에는 50대 중반인 딸도 여전히 어린아이처럼 보이는 듯했다.
거실에 나가 보니 아빠가 뒷짐을 지고 서성이고 계셨다.
“이제 내일 새벽에 가나. 집이 텅 비겠다. 텅 빈 집 돼서 어짜노… “
예전 같았으면 속으로만 삼키셨을 그 말을, 아빠도 이제는 선뜻 내비치셨다. 이미 짐을 싸면서도 마음이 무거웠는데, 아빠의 말에 울컥한 마음이 올라와 목이 메었다.
“아빠, 내년 봄에 또 올게요. 반년만 기다리세요. 나 또 올게요. 다음엔 더 오래 있다 갈게요.”
그리고 다음 날 새벽, 구순이 다 된 아빠와 팔순을 훌쩍 넘기신 엄마의 배웅을 받으며 택시에 올랐다. 대구 국제공항까지 20분쯤 걸렸다.
출국심사를 마치고 인천으로 가는 비행기를 기다리며 허전한 속을 달래려 커피숍에 들렀다. 커피 한 잔과 베이글을 앞에 두고 앉아 있으니, 엄마의 말이 떠올랐다. 언제부턴가 내가 돌아가면, 엄마는 내가 지내던 방의 방문을 며칠 닫아놓는다고 하셨다. 아빠가 들여다보고 너무 섭섭해하시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 생각을 하니 커피 한 모금이 눈물방울이 되었다.
‘오늘 또 방문을 닫아놓으시겠네… 텅 빈 집 된다고 아빠가 그러셨는데… '하는 생각이 들자, 눈물이 차올랐다. 아무리 참아보려 해도 끝내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주변에는 여행객들의 즐거운 대화 소리가 흘러나왔다. 해외로 떠나는 설렘에 목소리도 더 밝고 높았다. 나는 고개를 살짝 돌려, 손으로 얼굴을 가린 채 조용히 눈물을 훔쳤다.
자식이 떠난 자리의 허전함을 나도 이제는 조금 안다. 아들은 기숙사 생활을 했고 군대도 다녀왔으며, 지금도 해외에 있다. 딸도 교환학생을 다녀와 집을 비운 적이 있었다. 그때마다 허전함이 컸다. 괜스레 아이들 방에 들어가 휙 둘러보고 나오곤 했기에, 자식들의 빈자리가 어떤지 조금은 알 것 같다. 나에게도 힘들었던 아이들의 빈자리가 구순을 바라보는 부모님께는 더 크게 느껴질 것 같아 마음이 저렸다.
그런 생각에 마음이 무거웠지만, 한편으로는 싱가포르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이 더 크게 차올랐다. 비행기 안에서 나는, 나를 기다리고 있을 딸을 떠올렸다. 빨리 보고 싶고, 안아주고 싶고, 이야기하고 싶다는 생각에 마음이 설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