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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황여울 Jan 22. 2022

싱가포르 설날, 귤 두 개에 담긴 복과 행운의 의미

설 선물의 진정한 의미를 깨닫기까지

      

설날이 열흘쯤 남았다. 지금 싱가포르 곳곳은 빨간색, 주황색, 금색으로 화려하게 치장되어 있다. 설 명절은 이곳에서도 일 년 중 가장 큰 명절이다. 코로나19 이전만큼은 아니지만, 작년 설보다는 거리도, 백화점도, 슈퍼마켓도 분주해 보인다. 슈퍼마켓에 가면 다양한 중국어 설날 노래가 흘러나와 흥겨운 분위기를 자아낸다. 무엇보다 귤 상자가 잔뜩 쌓여 있어 눈길을 끈다. 싱싱한 귤을 사는 것은 이곳에서 가장 중요한 설맞이 준비 중 하나이다. 설에 귤을 주고받는 관습은 귤을 뜻하는 중국어 발음 ‘쥐쯔’에서 '쥐'가 행운을 뜻하는 길 ‘지’와 발음이 비슷하기 때문에 시작되었다. 특히 둥글고 큰 귤은 복과 행운을 의미한다.

 

슈퍼마켓에는 다양한 품종의 귤 상자가 진열되어 있다


20여 년 전, 싱가포르에 온 후 처음 맞는 설날이었다. 한국에서는 놀이방 선생님들께 핸드크림 같은 작은 선물을 드렸지만, 이곳에서는 아이들의 유치원 선생님들께 뭘 드려야 할지 고민이 되었다. 남편에게 회사 동료들에게 한 번 물어보라고 했더니, 귤 두 개만 드리면 된다고 했다."귤만 드린다고? 그것도 두 개만??" 


설 선물로 귤선물한다는 것이 의아하게 느껴졌다. 슈퍼마켓에 가 보니 설맞이 준비로 사람들이 많이 붐볐다. 평소에 잘 보이지 않던 시식 코너도 있었고 귤을 추천해 주고 포장해 주는 직원들도 있었다. 여러 종류의 귤을 하나씩 시식해 보한국에서 먹던 귤과는 맛이 조금 달랐다. 단맛이 좀 더 강하고, 속껍질이 두껍고, 굵은 씨가 있었다. 크기도 제주도 귤보다는 크고 오렌지보다는 조금 작았다. 한 상자 안에는 대략 20개 정도가 들어 있었는데 귤 하나하나 마다 얇고 부드러운 빨간색 비닐이나 한자로 ‘복’이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는 투명한 플라스틱 비닐에 싸여 있는 게 특이했. 가격은 한 상자에 10불(그 당시 환율로 6천 원) 내외여서 크게 부담스럽지도 않았다. 상한 게 없는지 확인한 후, 달고 과즙이 많은 루칸(Lukan)으로 한 상자를 사 왔다. 


루칸(Lukan)보다 조금 비싼 대만산 폰칸(Ponkan)이다


‘그럼 귤 개를 어떻게 드려야 하는 걸까?’ 포장도 하지 않고 드리는 건 예의가 아닐 것 같았다. 고민 끝에 선물 포장지를 사서 귤 두 개를 담고 스티커를 붙였다. 설을 며칠 앞두고 유치원에서 설맞이 행사가 열렸다. 나는 포장한 귤을 들고 설레는 마음으로 유치원에 갔다. 입학한 지 한 달여밖에 되지 않 영어도 중국어도 서툰 아이들이어서 행사에 잘 참여할 수 있을지 궁금했다. 아이들은 전통 의상을 입고 나와  노래를 부르며 율동을 했다. 다행히 우리 아이들도 율동을 곧잘 따라 해서 보는 내내 흐뭇했다. 공연이 끝나고 선생님께 준비해 간 귤을 드리려다 먼저 주위를 한 번 둘러보았다. 


'아, 이렇게 드리는 게 아니구나. 확인해 보길 잘했다.' 귤은 엄마들이 드리는 게 아니었다. 아이들이 선생님께 포장하지 않은 귤 두 개를 양 손바닥이 위로 향하게 올려 쥐고, 영어로 “해피 뉴 이어” 또는 중국어로 “신 니엔 콰이 러”라고 인사하며 공손하게 드렸다. '아, 저렇게 하는 거구나.' 나는 얼른 포장지를 벗겨 귤을 꺼내 우리 아이들 손에 쥐여주고, 선생님께 귤을 드리게 했다.     


모양이 둥글고 큰 과일인 포멜로도 길운을 상징하는 과일이다


설날 다음 날, 남편 회사 사장님 댁에 초대받아 갔다. 뭘 사가야 할지 또 고민이 되었다. 유치원 선생님들께는 귤 두 개를 드렸지만 사장님 댁에도 귤 두 개만 드리는 건 예의가 아닌 것 같았다. 귤 대신 ‘박과(Bak Kwa)’라고 불리는 육포 1킬로그램을 준비해 갔다. “Happy New Year!”라고 인사를 드리고 준비해 간 육포를 드렸더니, 내년부터는 비싼 육포 대신에 꼭 귤만 가져오라고 하셨다.           


이듬해 설날에는 사모님이 말씀하신 대로 귤만 준비했지만, 귤 두 개만 드리기에는 좀 쑥스러워서 20개짜리 귤 한 박스를 들고 갔다. 사모님은 또 놀라시면서 귤을 왜 이렇게 많이 가져왔냐고 하셨다. 그냥 의례적인 인사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집에 돌아갈 때 다시 내게 귤 두 개를 주시면서 "네가 가져온 만큼 귤을 돌려줄 게 없어서 미안하다"라고 하셨다.

         

설에 먹는 다양한 종류의 과자가 진열되어 있다


집 안팎을 꾸미는 장식물이다


그 이후 나는 알게 되었다. 내가 귤 두 개를 드리면 받은 사람이 또 나에게 귤 두 개를 준다는 것을. 비싼 육포 선물보다 귤 두 개가 더 중요한 설 선물이라는 것을 두 번의 설을 거치면서 비로소 깨달았다. 삼 년째 되는 해부터 나는 사장님 댁 방문뿐만 아니라 선생님들께 그리고 친구들에게도 귤 두 개로 인사를 한다. 친정엄마는 지금도 내게 "어떻게 사장님 댁에 방문하는데 귤 두 개만 가져가냐"라고 하시지만, 귤 두 개 이외의 선물은 가져가지 않는다. 크고 둥글고 싱싱하고 맛 좋은 귤을 사서 양손에 각각 하나씩 담고 그해 복과 행운이 가득하길 진심으로 기원하며 드린다.





<메인 사진: 이케아에서도 귤을 판매한다. 귤 24개에 $11.80(만 원)이다. 귤을 담은 바구니 안에는 빨간 봉투가 있는데, 세뱃돈은 이 홍빠오(빨간 봉투)에 넣어서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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