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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황여울 Jan 22. 2022

설 선물 고민 끝

귤 두 개면 충분해요

      

설날이 열흘쯤 남았다. 어딜 가도 빨간색의 화려한 장식으로 물들었다. 싱가포르는 인구의 75퍼센트가 중국인으로 구성되어 있어서 설은 이곳에서도 일 년 중에 가장 큰 명절이라고 할 수 있다. 코로나19 이전만큼은 아니지만 작년 설보다는 거리도 백화점도 슈퍼마켓도 분주해 보인다. 이맘때 슈퍼마켓에 가면 중국어로 부르는 다양한 설날 노래가 귀를 울리고 무엇보다 귤 상자가 가득가득 쌓여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싱싱한 귤을 사는 것은 이곳에서 가장 중요한 설맞이 준비라고 할 수 있다. 설에 귤을 주고받는 관습은 귤을 뜻하는 중국어 발음 ‘쥐쯔’에서 '쥐'가 행운을 뜻하는 길 ‘지’와 발음이 비슷하기 때문이다. 둥글고 큰 귤은 복과 행운을 뜻한다.

 

다양한 품종의 귤 상자가 진열되어 있다


2006년 2월, 아이들이 로컬 유치원에 입학한 후 처음 맞는 설날이었다. 한국에서는 놀이방 선생님들께 핸드크림과 같은 작은 선물을 드렸지만 이곳에서는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이 되어서 남편에게 회사 동료들에게 좀 물어보라고 했다.      


“ㅇㅇ 씨,  두 개만 드리면 된대.”

어 정말? 귤 두 개만 드린다고?"     


설 선물로 귤선물한다는 것이 새롭다는 생각이 들었다. 슈퍼마켓에 가 보니 설맞이 준비로 많이 붐볐다. 평소에 잘 보이지 않던 시식 코너도 있었고 귤을 추천해 주고 포장해 주는 직원들도 있었다. 여러 종류의 귤을 하나씩 시식해 보한국에서 먹던 귤과는 좀 다른 맛이었다. 단맛이 좀 더 강하고 속껍질이 두껍고 굵은 씨가 있었다. 크기도 제주도 귤보다는 크고 오렌지보다는 조금 작았다. 한 상자 안에는 대략 20개 정도가 들어 있었는데 귤 하나하나 마다 얇고 부드러운 빨간색 비닐이나 한자로 ‘복’이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는 투명한 플라스틱 비닐에 싸여 있는 게 특이했. 가격은 한 상자에 10불(그 당시 환율로 6천 원) 내외여서 크게 부담스럽지도 않았다. 상한 게 없는지 확인해 보고 달고 과즙이 많은 루칸(Lukan)으로 한 상자를 사 왔다. 


루칸(Lukan)보다 조금 비싼 대만산 폰칸(Ponkan)이다


‘그럼 귤 개를 어떻게 드려야 하는 걸까?’ 포장도 하지 않고 드리는 건 예의가 아닐 것 같았다. 고민 끝에 선물포장 비닐봉지를 사서 귤 두 개를 담고 스티커를 붙였다. 설을 며칠 앞두고 유치원에서 설맞이 행사가 열렸다. 포장한 귤을 가지고 설레는 마음으로 유치원에 갔다. 입학한 지 한 달여밖에 되지 않 영어도 중국어도 못 하는 아이들이어서 행사에 잘 참여할 수 있을지 궁금했다. 아이들은 전통 의상을 입고 나와  노래를 부르며 율동을 했다. 다행히 우리 아이들도 율동을 곧잘 따라 해서 보는 내내 흐뭇했다. 공연이 끝나고 선생님께 준비해 간 귤을 드리려다 주위를 한번 둘러보았다. '아, 이렇게 드리는 게 아니구나. 먼저 안 드리길 잘했다.'


귤은 엄마들이 드리는 게 아니었다. 아이들이 선생님께 포장하지 않은 귤 두 개를 손바닥이 위로 오게 하여 양손에 하나씩 쥐고 영어로 “해피 뉴 이어.” 또는 중국어로 “신 니엔 콰이 러.”로 인사하면서 공손하게 드렸다. '아, 저렇게 하는 거구나.' 얼른 포장해 온 귤을 꺼내 우리 아이들 손에 쥐어주고 선생님께 귤을 드리게 했다.     


모양이 둥글고 큰 과일인 포멜로도 길운을 상징하는 과일이다


설 다음 날, 남편 회사 사장님 댁에 초대받아 갔다. 뭘 사가야 할지 또 고민이 되었다. 유치원 선생님들께는 귤 두 개를 드렸지만 사장님 댁에도 귤 두 개만 드리는 건 예의가 아닌 것 같았다. 귤 대신에 ‘박과(Bak kwa)’라고 불리는 육포 1킬로를 준비해 갔다. “Happy New Year.”라고 인사를 하고 준비해 간 육포를 드렸더니, 내년부터는 비싼 육포 대신에 꼭 귤만 가져오라고 하셨다.           


이듬해 설날에는 사모님이 말씀하신 대로 귤만 준비해 갔다. 귤 두 개만 드리기 좀 뭣해서 20개짜리 귤 한 박스를 들고 갔다. 사모님은 또 놀라시면서 귤을 왜 이렇게 많이 가져왔냐고 하셨다. 그냥 겉치레 인사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집에 돌아갈 때 다시 내게 귤 두 개를 주시면서 네가 가져온 만큼 귤을 돌려줄 게 없어서 미안하다고 하셨다.

         

설에 먹는 다양한 종류의 과자가 진열되어 있다


집 안팎을 꾸미는 장식물이다


그 이후에 나는 알게 되었다. 내가 귤 두 개를 드리면 받은 사람이 또 나에게 귤 두 개를 준다는 것을. 비싼 육포 선물보다 귤 두 개가 더 중요한 설 선물이라는 것을 두 번의 설을 거치면서 비로소 알게 되었다. 삼 년째 되는 해부터 나는 사장님 댁 방문뿐만이 아니라 선생님들께 그리고 친구들에게도 귤 두 개로 인사를 한다. 친정 엄마는 요즘도 내게 어떻게 사장님 댁에 방문하는데 귤 두 개만 가져가냐고 하지만 귤 두 개 이외의 선물은 가져가지 않는다. 크고 모양이 둥글고 싱싱하고 맛 좋은 귤을 사서 양손에 하나씩 담고 그해 복과 행운이 가득가득하길 진심으로 기원하며 드린다.





<메인 사진: 이케아에서도 귤을 판매한다. 귤 24개에 $11.80(만 원)이다. 귤을 담은 바구니 안에 빨간 봉투가 있는데 세뱃돈은 이런 홍빠오(빨간 봉투)에 넣어서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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