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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황여울 Feb 27. 2022

내게 주는 선물, 힐링 데이

센토사(Sentosa)에서 하루를 보내다


일을 하는 즐거움 중의 하나는 꿀맛 같은 휴식 시간을 기다리는 것이다. 그 시간이 내게 주어졌을 때 몸과 마음이 반응하는 그 기쁨과 자유로움은 이루 말할 수 없을 만큼 크다. 내가 다니는 학교는 4월에 1학기가, 10월에 2학기가 시작된다. 보통 학기가 시작되기 3주일 전부터 바빠지기 때문에 나는 작년 9월 중순부터 이번 학기를 위해 온전히 내 시간과 열정과 노력을 쏟아부었고 마침내 지난 요일에 한 학기 수업과 성적 처리까지 모두 끝났다. 학기 초 세웠던 목표도 달성했고 기쁜 마음으로 같이 고생한 선생님과 하루 나들이를 가기로 했다.      


5개월 만에 맞는 자유 시간을 어디에서 보낼까 생각했다. 평소에 잘 가지 못하는 몇 군데를 떠올려 보았다. 가포르에서는 먼 곳이라고 해도 차로 40분 내외이지만 심리적인 거리가 먼 몇 군데 중에 하나를 골랐다. 공항 근처 이스트 코스트 파크(East Coast Park)에 가서 자전거를 타고 하루를 보낼까 아니면 센토사(Sentosa)에 가서 바다 구경도 하고 카페도 들러 볼까 고민하다가 결국 센토사에 가기로 결정했다. 소풍 가기 전날 설레는 아이처럼 다음 날 입고 갈 옷을 고르고 가방을 골랐다. 반바지에 민소매 티셔츠와 휴양지 분위기에 맞춰 태국에서 사 온 짐 톰슨 슬링백으로 골라 놓았다. 아침 일찍 서두르지 않기 위해 미리 가방도 싸 놓았다. 날이 맑길 바라는 내 마음과는 다르게 그날 밤 잠자리에 들 무렵부터 비가 세차게 내리기 시작했다. 아침에 일어나니 하늘은 꾸물 꾸물했지만 소낙비는 가고 보슬비가 내렸다.


실로소 비치(Siloso Beach)로 가려면 모노레일을 타고 비치 스테이션(Beach Station)에서 내려야 한다


센토사로 들어가려면 케이블카나 자동차 또는 모노레일을 타야 는데 이번 달까지 무료로 이용할 수 있는 모노레일을 타고 갔다. 임비아 스테이션(Imbiah Station)에 내려 브런치 맛집으로 찾아 놓은 프랑스 레스토랑을 향해 걸었다. 부슬비가 내렸지만 우산을 쓰고 걷기에 불편함은 없었다. 초록 초록한 잔디밭이 잘 보이는 야외석으로 자리를 잡았다. 식당 안에서 뿜어져 나오는 고소한 버터 냄새에 욕이 돋았다. 크루아상 한 바구니와 야채와 버섯 토마토 베이컨 치즈 달걀을 넣고 구운 크레이프를 주문해서 따뜻한 아메리카노와 같이 먹었다. 여유로운 오전을 보내다가 실로소 비치(Siloso Beach)를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모노레일을 타고 비치 스테이션(Beach Station)에서 내렸다. 역 바로 앞에 있는 커피빈은 관광객의 급감에도 불구하고 영업 중이었다. 부모님과 이곳에 와서 커피 한 잔을 마시면서 이야기했던 그때가 떠올랐다. 그러고 보니 부모님이 다녀가신 지 10년이 되었다. 해외에 사는 자식해외동포라더니 그 말도 맞는 것 같아 씁쓸했다. 천천히 걷다 보니 센토사에서 아이들이 가장 좋아했루지(Luge)를 타는 곳이 나왔다. 아이들이 리프트를 타고 올라가면 나는 밖에서 루지를 타고 내려올 아이들을 기다렸다. 혼자 루지를 타고 내려오는 아이들이 예뻐서 사진도 여러 장 찍었지만 빠른 속도로 내려오는 루지 탓에 초점이 맞지 않은 사진이 더 많았다. 루지를 타러 센토사에 가는 날에는 아이들에게 필요한 것들을 챙기느라 이른 아침부터 바빴다. 선크림, 모자, 갈아입힐 옷, 시원한 물을 넣은 보냉병, 전날부터 냉동실에 얼려둔 물수건 몇 장, 한입 크기로 만든 주먹밥 등을 챙기다 보면 한 짐이 되었다. 아이들은 뭐가 그렇게 재미있는지 땀을 찔찔 흘리며 내려와서 세 번을 타고도 더 타고 싶어 했다. 티켓값도 비싸고 뙤약볕 아래에서 아이들을 기다리는 것도 힘들어서 가게 앞에 파는 아이스크림 하나씩 사주는 것으로 달랬다. 세월이 참 빠른 것 같다. 그때의 아이들은 이제 모두 대학생이 되었고 배낭 한 짐 짊어지고 아이들을 챙겼던 30대의 나는 이제 흰머리가 눈에 띄는 50대가 되었다.     


길을 따라 조금 더 걸었다. 자주 가던 피자집이 보였다. 해변에 자리한 피자집은 한국에서 친구들이나 가족이 올 때면 늘 같이 갔던 곳이다. 모래알이 샌들에 파고드는 기분 좋은 그곳에서 이태리식 피자를 먹고 트로피컬 음료를 마시며 이야기꽃을 피웠었다. 엄마도 아빠도 동생도 조카도 시부모님도 시누이도 친구들도 모두 그곳에서 먹고 웃고 마셨다. 가족들 생각이 났다. 원래 점심은 이곳에서 먹계획이었지만 가지 않았다. 다음에 올 누군가를 위하여 아직은 소중한 추억으로 남겨두고 싶었다.     


트램을 타고 실로소 비치를 천천히 둘러봤다


야외 바에 앉아 크림이 풍부한 커피 한 잔에 기분 좋은 바람도 마셨다


조금 더 걷다 보니 커피 맛집으로 미리 찾아 둔 카페가 나왔다. 야외 바에 앉아 플랫화이트 한 잔을 마셨다. 풍부한 크림이 진한 에스프레소와 함께 잘 어우러져 고소한 맛이 났다. 한참을 여유롭게 앉아 있다가 트램을 타고 해변을 한 바퀴 돌았다. 수영복을 입고 모래사장 위에 앉아 이야기를 하는 사람들도 보였고 한쪽에 설치된 그네를 타는 사람들도 보였다. 평화로웠다. 비는 그치고 습한 바람에 몸이 끈적거렸지만 아무것도 급할 것 없이 느릿느릿 운전하는 트램 안에서 편안함을 느꼈다. 람을 맞으러 간 그곳에서 바람보다는 잊고 있던 옛 추억을 더 많이 만난 것 같아 참 좋았다. 저녁 무렵이 되어 유니버설 스튜디오가 있는 센토사 초입새로 돌아왔다. 코로나19가 유행하기 전에는 관광객들로 붐비던 곳이 한산하기만 했다. 다시 생기를 찾는 날이 얼른 오길 바라며 센토사를 뒤로 하고 모노레일을 탔다. 종착지인 비보시티(Vivo City)에 내 저녁으로 부드럽게 구운 랑스식 로스트 치킨에 크렌베리 소스를 얹어 먹고 레모네이드도 한 잔 마셨다. 오랜만에 옷 구경도 한 후 깜깜해진 밤이 되어서 집으로 돌아왔다.


유니버설 스튜디오(Universal Studios) 입구 포토존이 한산했다


센토사에 있던 37미터 높이의 입체 머라이언(Merlion)은 철거되고 작고 앙증맞은 장식물만 남아있었다


한국 음식과 디저트를 팔던 식당도 문이 닫혀 있었다


말레이어로 평화와 고요함을 뜻하는 센토사에서 하루 동안 햇볕도 비도 바람도 추억도 느끼며 진정한 힐링의 시간을 보냈다. 샤워를 하고 침대에 누우니 세상 부러울 게 없었다. 앞으로 3주일은 학교 노트북을 열지 않아도 된다. 내일 할 일을 메모해 두지 않아도 된다. 책상 위에 놓여있던 교재와 수업자료들도 한쪽으로 잠시 치워 두었다. 이제 뭘 하고 이 소중한 시간을 보낼까. 바깥바람을 많이 쐬고 싶다. 그래, 차이나타운에 가서 얌차(Yumcha)를 먹어야겠다. 이스트코스트에 가서 자전거도 타야지. 보타닉가든(Botanic Garden)에 가서 난꽃도 보고 가든스 바이 더 베이(Gardens by the Bay)에 꽃구경도 하러 가야겠다. 여유롭게 친구도 만나고 오차드(Orchard)에 가서 쇼핑도 해야지. 온종일 침대에서 뒹굴고 싶은 날에는 책도 읽고 드라마도 봐야겠다. 생각만으로도 가슴이 부푼다. 그동안 주말도 없이 정말 애쓴 나를 위해 아낌없는 선물을 해 주고 싶다. 즐거운 시간 행복한 기억을 차곡차곡 모아 두었다가 새 학기가 시작되면 꽃같이 예쁜 내 학생들에게 아낌없이 퍼주고 싶다.



메인 사진: 날이 흐려서 예쁘게 나오진 않았지만 실로소 비치에서 찍은 마음에 드는 사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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