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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황여울 Feb 11. 2022

여름 그리고 또 여름

기억 속의 사계절


한국에 있는 가족이나 친구들과 전화 통화를 하다 보면 내게 빠지지 않고 물어보는 질문이 있다. 싱가포르는 날씨가 어떠냐고. 일 년 내내 덥다고 해도 매일 같은 날씨라고 생각을 못 하는 것 같다. 한국은 사계절이 있지만 이곳은 말 그대로 변화가 전혀 없는 여름만 있다. 적도 부근에 있어 열대기후에 속하고 늘 덥고 늘 습도가 높다. 비가 오는 날에는 기온이 좀 떨어지기도 하지만 일 년 내내 30도를 웃도는 날씨에 습도가 80퍼센트로 높은 편이다. 이곳에 몇 번 다녀가신 친정 엄마는 이런 말씀을 자주 하신다.

     

“너거 거기는 일 년 내내 더워서 어째 사노. 머리도 아프고 나는 도저히 더워서 못 살겠더라.”

“아니, 나는 괜찮은데. 이제 익숙해져서 그런지 더운 거 잘 모르겠는데.”     


처음 싱가포르에 왔을 때는 후덥지근한 날씨와 습기 때문에 땀도 많이 나고 끈끈한 느낌도 많이 들었다. 레는 마음으로 도착한 창이 공항에서 카트를 끌고 밖으로 첫 발을 디딘 그 순간이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난다. 습도가 높아 입고 온 긴 청바지와 니트가 물에 젖 듯 무겁게 느껴져 ‘어, 이거 뭐지? 내가 땀을 이렇게 많이 흘렸나.’하는 생각이 들 정였다. 그날 아침만 해도 10월 중순 한창 단풍도 예쁘고  상쾌한 가을 하늘 아래 있었는데 몇 시간의 비행으로 나는 시간을 거슬러 여름 속으로 들어왔다.     




우리 집은 동향이라 아침 일찍 햇볕이 들어온다. 우기가 아닐 때에는 햇볕이 따갑도록 내리쬐고 아침부터 집이 후끈해진다. 그런 날이면 나는 아침 햇볕을 그냥 버리기 아까워서 이불 빨래를 한다. 한때 건조기에 넣어서 말리기도 했지만 햇볕 아래 말린 이 냄새가 좋아 발코니를 쓱쓱 닦고 거기에 이불널어 말린다. 밤새 베고 잔 베개도 빨래대에 얹어 발코니 앞으로 쓱 밀어 놓고 바람과 햇볕 아래 바짝 말린다. 햇볕이 강할 때는 몇 시간만 말려도 이미 이불 침대 패드도 바짝 마른다. 뜨끈뜨끈하도록 말린 이불에 보송보송한 베갯잇이 주는 분 좋은 느낌에 그날 밤엔 잠이 절로 온다. 가끔 나도 창을 등지고 서서 잠깐 동안 햇볕을 쬐기도 한다. 등이 따끔거리지만 그 느낌도 괜찮다.  


아침 햇살이 좋고 하늘이 새파랗다고 해서 하루 종일 맑은 건 아니다. 언제 해가 났나 싶을 정도로 금세 하늘이 흐려지면서 비가 내리칠 때도 많다. 세차게 비가 잠시 내리고 다시 맑아질 때도 많아 이불 빨래를 한 날에는 하늘을 잘 살피고 이불을 널었다가 걷었다가 해야 한다. 일껏 빨아 널어놓은 이불이 비를 맞는 건 순식간이다. 처음 이곳에 왔을 땐 렇게 갑작스레 소낙비가 내리는 줄 몰랐다. 아침나절 해가 좋아 발코니이불을 널어놓고 장을 보러 갔다가 잠깐 집을 비운 새 소낙비 때문에 이불이 온통 다 젖어버렸다. 비에 흠뻑 젖은 이불은 무겁기도 하고 또다시 빨래를 하고 말려야 해서 번거로웠다. 요즘은 아무리 맑은 날이라도 외출할 때는 거실 창문을 모두 닫고 나가지만 가끔 잊어버리고 그냥 나간 날에 비가 오기라도 하면 거실 안으로 들어온 빗물을 닦아내느라 바빠진다.      


더운 건 익숙해졌지만 습도가 높기 때문에 여러 가지 불편한 게 많다. 요즘은 비가 자주 오는 우기라서 집이 더 습하다. 어디든지 곰팡이가 잘 생겨서 관리를 잘해야 한다. 집안 곳곳 환기도 잘 시켜줘야 하고 특히 옷장에는 제습제를 넣고 자주 갈아줘야 한다. 신발장에 넣어 둔 구두는 뒤축이 잘 상한다. 한동안 안 신은 구두를 꺼내면 뒤축이 가루처럼 부스러지거나 구두 밑창이 쩍 하고 벌어진다. 집에서 꺼내 신었을 때는 괜찮았는데 밖에 나가 걸어 다니다가 구두 밑창이 떨어지거나 구두 굽이 떨어진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한 번은 학교 교실에서 수업 중에 샌들 밑창이 쩍 하고 떨어져서 정말 난감했었다. 밑창을 떼고 샌들을 신으니 무 미끄러워서 어쩔 수 없이 신발을 벗고 수업을 한 적도 있었다. 에어컨 바람을 맞으며 맨발로 찬 바닥에 서서 3시간 반을 수업하고 집에 오니 발은 이미 얼음장이 되었고 다리가 떨어져 나가는 것 같이 아팠다. 그 이후 나는 차에 여벌의 운동화를 넣고 다닌다. 구두는 어차피 차 안에서도 상하기 때문이다.      




계절의 변화를 못 느끼고 산 지 이제 17년째이다. 한국을 떠나온 후 나는 봄을 느껴보지 못했다. 일 년에 한 번 가던 한국 방문도 주로 학교 방학인 9월에 잠시 다녀왔다. 아이들의 학교와 내가 일하는 학교의 방학이 달라서 혼자 가더라도 열흘이 채 못 되어 돌아왔다. 9월 초는 아직 가을이라고 하기엔 이른 늦여름과 초가을이 만나는 때이다. 가을의 단풍도 한국을 떠나온 이후에는 보지 못했다. 출장 다녀온 남편이 가지고 온 단풍잎 몇 장으로 가을의 냄새를 느낄 뿐이다. 다행히 겨울은 내가 마지막으로 한국에 간 2019년 12월 그때 눈도 보고 한겨울 추위도 느껴 볼 수 있어 좋았다.    


누군가가 계절을 이야기할 때 나는 오늘이 며칠인지 날짜를 먼저 떠올린다. ‘오늘이 2월 11일이지. 그럼 한국은 겨울이 슬슬 물러갈 때가 되었겠다. 그때는 날씨가 어땠더라. 아, 두꺼운 패딩은 안 입어도 되겠지. 좀 있으면 꽃샘추위라는 말도 들리겠네. 4월엔 벚꽃도 필 텐데.’ 내게 있어 봄, 가을, 겨울은 감각으로 느끼는 것이 아니라 머릿속에 남아 있는 기억으로 떠올려야 한다. 여름만 있는 나라에서 사는 것은 편리한 점도 많지만 봄, 여름, 가을, 겨울, 계절의 변화도 느껴보고 싶다. 봄의 느낌은 어떨까. 봄이 오는 소리는 어떨까.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봄봄봄’ 노래와 함께 맞는 봄은 어떨까.     


여름 그리고 또 여름인 이곳에도 봄이 왔다. 백화점 안 장식물은 온통 핑크색의 봄으로 가득 찼다. 한자로 봄을 뜻하는 ‘춘’을 써 놓은 걸 보니 이제 머릿속의 봄을 떠올릴 때가 된 것 같다. 옷가게에 전시되어 있는 옷에서도 봄이 느껴진다. 변함없는 계절 속에 변화를 느끼려면 내가 기억하고 있는 모든 감각을 다 사용하여 떠올려야 한다. 어쩌면 내 기억 속의 사계절은 오히려 더 자유롭고 좋은 기억으로 남아 있을지도 모른다. 이번 봄은 어떤 기억 속의 봄으로 들어가 볼까. 내게 다가올 그 봄도 기다려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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