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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황여울 Jan 29. 2022

오늘 이 밤이 너무 좋다

나 자신으로 존재하는 공간에서


토요일 밤이다.

잠시 쉬어갈 내일이 있어서 정말 좋다.

이 밤 천천히 즐기며 잘 수 있어서 너무나도 좋다.

     

산더미같이 쌓인 일에 허덕이다가 주말이라는 시간이 있어 조금 쉬어가기로 한다. 요즘 학기말이라 시험도 많은 데다가 성적 처리도 시작되었다. 눈을 뜨면 하루가 어떻게 지나가는지 모르겠다. 어제는 점심도 저녁도 거를 만큼 바빴다. 하고 있던 일이 끝나기도 전에 또 새로운 일이 쌓이고 쌓이다 보니 머리가 과부하되었고 몸도 많이 굳었다. 건조해진 눈에 눈물약을 수시로 넣어주고 잠자리에 들기 전에 온열 아이마스크를 하고 잔다. 자정을 훌쩍 넘긴 시간에 겨우 씻고 침대에 앉아 브런치 작가님들의 글을 잠시 읽는다. 라이크잇이나 댓글을 남기고 싶지만 혹시라도 내가 남기는 알림음에 잠이 깨실까 봐 조금 미뤄둔다. 매일 이런 삶을 산다면 정말 힘들겠지만 2월 한 달을 잘 넘기고 나면 학기말 방학이라는 꿀 같은 시간이 온다.   

  

힘이 들 때 나는 아주 잠깐 동안이라도 눈을 감고 내가 좋아하는 것들을 생각해 본다. 내가 좋아했거나 좋아하는 장소, 사람, 음식, 느낌, 기분 등을 떠올려 보고 잠시나마 그 시간 속에 머무른다. 5분도 안 되는 짧은 시간이지만 어느새 입꼬리가 올라가고 몸도 좀 이완되는 느낌이 든다. 나는 힘이 들수록 이런 연상을 자주 해서 몸과 마음을 환기시킨다.       


오늘은 얼마 전에 읽은 소설책의 한 부분이 생각나서 하루 중 내가 많은 시간을 보내는 지금 이 공간을 가만히 눈을 감고 낯설게 떠올려 보았다.      


그녀가 어느 공간을 좋아한다는 건 이런 의미가 되었다. 몸이 그 공간을 긍정하는가. 그 공간에선 나 자신으로 존재하고 있는가. 그 공간에선 내가 나를 소외시키지 않는가. 그 공간에선 내가 나를 아끼고 사랑하는가. 『어서 오세요, 휴남동 서점입니다』 황보름 지음     


이 공간은 내가 일도 하고 쉬기도 하고 잠도 자는 곳이다. 바로 내 방이다. 우선 책상이 먼저 눈에 떠오른다. 오래되어 서랍 밑이 내려앉은 책상. 신문으로 벌어진 틈을 막아둬도 그 사이로 어느새 굴러간 볼펜도 떨어지고 쑤셔 넣어놓은 종이도 반쯤 얼굴을 내밀고 있다. 새 책상으로 바꿔볼까 생각하다가도 서랍만 빼면 아직은 쓸만한 것 같아 마음을 접었다. 책상 위에는 사이즈가 맞지 않는 유리가 있다. 결혼 후 화장대에 얹어놓던 유리인데 어쩌다 이곳까지 와서 오래된 화장대는 버리고 유리만 남아 24년째 방 안에 있다.


책상 위에 놓여있는 것들을 하나씩 떠올려 본다. 노트북 두 대, 모니터 한 대, 펜 태블릿 하나, 마이크 하나가 있다. 이것들은 모두 내가 일을 하고 화상 수업을 하는데 필요한 것들이다. 오미크론 바이러스 때문에 학교는 다시 온라인 수업으로 바뀌어 집에서 실시간 화상 수업을 하고 있다. 노트북이 주는 느낌은 딱딱하지만 그 속에서 만날 수 있는 학생들을 떠올리면 노트북도 이내 온기가 느껴진다. 나는 학생들에게 애정이 많은 편이다. 한국어를 잘하든 못하든 우리말과 문화에 관심을 가지고 배우려는 마음이 고맙고 예쁘기 때문이다.      


천천히 시선을 옮겨 내 침대를 떠올렸다. 두 달 전 새로 산 침대이다. 그전까지는 결혼할 때 엄마가 사준 침대를 계속 썼었다. 어찌나 튼튼하게 만들었던지 20년을 넘게 썼다. 침대 상판 한쪽이 부러져 몸이 살짝 기우는데도 정이 많이 든 침대를 버리지 못해 조금 더 쓰다가 잠자리가 불편할 정도가 되어 새 침대로 바꿨다. 비싸지는 않지만 실용적이고 편안하여 요즘처럼 피곤할 때 꿀잠을 자게 도와주는 고마운 침대이다. 포근하게 감싸주는 매트리스가 마음에 든다.      


침대 옆에 있는 책장을 떠올렸다. 한국어 교육과 내 수업 자료가 잔뜩 꽂혀 있는 책장이다. 한쪽에는 시집만 모아두었고 또 다른 한쪽에는 소설과 수필로 정리해 두었다. 시집은 바쁜 시간에 잠시 꺼내 읽기가 좋아 책상 근처에 두었다. 내가 좋아하는 정호승 시인의 시집을 제일 앞에 꽂아 두었다. 그가 쓴 인생 동화 『울지 말고 꽃을 보라』는 내가 아주 좋아하는 책이다. 시인의 목소리로 들려주는 동화책은 참 따뜻하다. 


시선을 조금 옮겨 창밖을 떠올렸다. 크지 않은 방에 아주 큰 창이 있다. 내가 이 아파트를 좋아하는 건 집 안 어디에도 창이 크게 나 있기 때문이다. 동쪽으로 난 내 방 창은 아침 일찌감치 햇살이 들어와 나를 깨운다. 바닥의 가장 아래에서부터 천장까지 한쪽 벽면에 나 있는 큰 창은 방 안에 오래 머무는 내게 바깥의 바람과 냄새와 소리를 느끼게 해 준다. 아침엔 따스한 햇살을 보고 한낮엔 푸른 하늘과 구름을 보고 밤엔 별빛을 볼 수 있다. 아무 생각 없이 잠시 하늘을 보고만 있어도 마음이 고요해진다. 밤이 깊어져 갈수록 더 빛날 별빛과 달빛을 떠올려 본다.   


가만히 눈을 떴다. 조금 편안해졌다. 많이 신경 쓰고 머리 쓰고 집중하고 일하느라 힘들었던 내 몸에게 잠시 쉬어가는 시간을 주었다. 온열 아이마스크를 떼고 나니 눈도 좀 부드러워졌다. 눈물약 한 방울을 떨어뜨렸다. 이 공간에 있는 나는 나를 사랑하고 소중히 여기며 그 마음으로 나와 함께하는 타인들에게도 나눌 여유로운 마음을 얻는다.  라디오에서 잔잔한 노래가 흘러 나온다. 나는 이 시간이 정말 좋다. 특히 내일 쉴 수 있는 오늘 이 밤이 너무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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