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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황여울 Oct 05. 2022

엄마 생각이 나

함께 했던 즐거웠던 시간들


엘리베이터 문 앞에서 엄마가 기다리고 있었다. 14층까지 올라가는 시간은 나에게도 설레는 시간이었고 분명 엄마에게도 설레는 시간이었을 것이다. 3년 만에 보는 엄마 얼굴은 생각보다 변함이 없었다. 주름이 크게 더 많이 생기지도 않았고 뽀얀 피부 여전했다. 아빠를 보려고 서둘러 집으로 들어갔다. 아빠는 그새 등이 조금 더 굽으셨고 당뇨 때문에 눈이 조금 더 불편해지셨다. 마스크를 벗고 손을 씻었다. 볼에 살이 조금 더 오른 덕분인지 엄마는 내 얼굴을 보시고는 예전보다 보기 좋아졌다고 하셨다.  일 년 만에 보는 사위에게도 반가운 얼굴을 보이셨다. 엄마는 늘 ㅇ서방이 첫정이라서 뭘 해도 예쁘다는 말을 자주 하신다. 남편과 나 이렇게 둘만 친정에 오니 마치 신혼 때로 돌아간 것처럼 기분이 들뜨고 좋았다. 엄마는 사위가 좋아하는 떡과 단술을 내놓으셨다. 요즘따라 기운도 없고 식은땀도 많이 나서 움직이기가 힘들다는 엄마의 말에 남편은 집밥 대신 맛집을 니면서 외식하자고 했다. 남편이 있는 동안 아침은 집에서 먹고 점심과 저녁은 밖에서 사 먹었다. 남편은 이틀 동안 친정에 머물면서 부모님과 함께 시간을 보낸 후 서울로 돌아갔다.


생방송투데이에 방영된 식당에 엄마가 가 보고 싶다고 하셨다. 흑돼지 해물 삼합인데 오겹살도 맛있었고 해물도 싱싱해서 부모님 모두 잘 드셨다.


남편이 서울로 돌아간 날 밤 나는 일주일 동안 엄마하고 뭘 하면 좋을지 생각했다. 매일 외출을 해서 맛있고 영양가 있는 음식 먹고 분위기 좋은 곳에서 커피 마시는 게 좋을 것 같았다. 엄마가 기운이 없는 것은 어쩌면 집에 있는 시간이 많고 늘 먹던 집밥을 드시기 때문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엄마와 동성로 지하상가에도 가고 롯데 백화점에도 갔다. 엄마 혼자서는 옷을 구경하기도 또 옷을 고르기도 쉽지 않은데 딸과 같이 다니니까 참 좋다고 하셨다. 옆에 있지도 못하고 자주 오지도 못하는 게 많이 미안했다. 대신동 서문 시장에도 가고 현대 아웃렛에도 갔다. 집 근처 대백프라자에도 가고 수성못에도 갔다. 맥도날드에서 맥모닝도 먹고 브런치 맛집에서 브런치도 먹었다. 엄마와 자주 가던 커피명가에 들러 핸드드립 커피도 마셨다. 예전에는 늘 라테를 마시던 엄마가 이제는 신경성 장염 때문에 캐모마일 티를 마시는 게 조금 안타까웠지만 엄마는 내 커피 한 모금을 맛보는 것으로 아쉬움을 달랬다. 밤이면 내 방에 오셔서 이불 위에 앉아 시간이 가는 줄도 모르고 이야기를 나눴다. 매일 외출을 해도 괜찮았고 매일 외식을 해도 배가 많이 아프지 않은 걸 보면서 기운이 없다는 말은 외롭다는 말의 다른 표현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엄마가 차려준 아침이다. 호박잎 쌈과 된장찌개, 열무김치, 더덕구이, 육전과 생선전, 도라지나물과 고사리나물, 정구지무침,갈치구이. 내가 오기 며칠 전부터 조금씩 준비했을 것이다


사실 지난 3년 동안 나는 엄마에게 엄마는 또 나에게 섭섭한 마음이 있었다. 엄마와 나는 예전부터 둘도 없는 친구 같으면서도 자주 삐걱거려서 서로의 마음에 섭섭함을 남겼다. 만나서 이야기를 하면 금세 풀릴 오해도 말할 시기를 놓치고 지내다 보니 마음에 그늘이 져 있었다. 특히 코로나19 유행이 시작된 무렵 온라인 수업이라는 새로운 수업 방식에 적응하고 끊임없이 연구하느라 신경이 무척이나 곤두서 있어서 엄마의 전화를 제대로 받을 수가 없었다. 마음속에 있는 이야기를 하지도 못한 채 시간이 흘러버렸다. 고요한 밤에 엄마와 마주 앉아 이야기를 하니 섭섭했던 마음은 눈 녹듯이 사라졌다. 평소 겉으로 사랑을 잘 표현하지 못하는 엄마는 내게 듣기 좋은 따뜻한 말을 건네지는 못했지만 나를 향한 엄마의 마음은 말이 필요 없었다. 식은땀을 흘리고 기운이 없다고 하시면서도 내가 좋아하는 음식을 하나라도 더 해 주려고 하신 게 바로 엄마가 사랑을 표현하는 방식이었다. 어느 날에는 보드라운 호박잎을 살짝 쪄서 된장찌개와 함께 상에 놓으셨고 어느 날에는 싱싱한 꽃게를 사다가 시원하게 꽃게 찌개를 끓이셨다. 전복을 가득 넣고 국을 끓이고 싱가포르에서는 먹을 수 없는 제주 생물 갈치를 굽거나 조려 놓으셨다. 내가 좋아하는 캠벨 포도와 커피우유도 베스킨라빈스 아이스크림도 사 오셨다. 하루하루가 즐거웠던 시간은 속하게도 쏜살같이 지나가버리고 마지막 날 밤이 되었다. 엄마는 내게 “ㅇㅇ야, 이제 가면 언제 오노.”라는 말을 하시며 섭섭한 마음을 추지 못하셨다.


딸이 오면 가고 싶었다던 브런치 카페 우니카트에 갔다. 샐러드와 수프도 맛있었고 아보카도 샌드위치도 만족스러웠다. 빌레로이앤보흐 머그컵에 나오는 커피는 맛이 조금 아쉬웠다.


아껴가며 보낸 일주일이 그렇게 지나고 떠날 시간이 되었다. 수서로 가는 기차가 플랫폼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결국 참고 있던 눈물이 터졌다. 엄마를 안았다. 엄마도 울었다. 기차에 올라 자리에 앉은 후 창밖을 보았다. 엄마 모습이 안 보였다. 늘 기차가 떠날 때까지 나를 향해 손을 흔들던 엄마가 어쩐 일인지 고개를 빼고 보아도 보이지 않았다. 헤어질 때 잠시 울었던 지난날과 달리 기차 안에서도 흐르는 눈물을 멈출 수가 없었다. 하얀 마스크가 끊임없이 눈물을 받아내었다. 서울에 올라와 시댁에 있을 때도 문득문득 엄마가 생각났다. 시어머니와 이야기를 할 때도 생각이 났고 책을 보다가도 생각이 났다. 싱가포르로 가는 비행기 안에서도 엄마가 생각났다. 웬일인지 자꾸자꾸 생각이 났다. 마음을 달래려고 다큐멘터리 영화 하나를 틀었다. "한글과 사랑에 빠진 칠곡 할머니들의 두근두근 욜로 라이프"라는 문구에 이끌려 영화 '칠곡 가시나들'을 보기 시작했다. 할머니들의 한글 학습과 일상을 관찰하는 유쾌한 영화라고만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다. 중간중간 할머니들이 읊는 자작시에 내 눈가가 촉촉이 젖어들기 시작했다. 떨궈진 마음과 애써 참고 있던 눈물은 결국 이원순 할머니의 시 '어무이'를 타고 주르륵주르륵 흘러렸다. 어두워진 조명에 눈물을 감추고 모로 누웠다. 리고 참 동안 마음을 달랬다.


어무이  

                                이원순     

80이 너머도

어무이가 조타

나이가 드러도

어무이가 보고시따

어무이 카고 부르마

아이고 오이야 오이야

이래 방가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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