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유환희 Aug 14. 2016

기다림, 기다리는 사람, 사랑

중국의 선비가 한 기녀를 사랑하게 되었다. 그 기녀는 선비에게 "선비님께서 만약 제 집 정원 창문 아래서 의자에 앉아 백일 밤을 기다리며 지새운다면, 그때 저는 선비님 사람이 되겠어요"라고 말했다. 그러나 아흔아홉 번째 되던 날 밤 선비는 자리에서 일어나 의자를 팔에 끼고 그곳을 떠났다.
- 롤랑 바르트,  <사랑의 단상> '기다림' 중에서

선비는 왜 아흔아홉 번째 되던 날 밤 그곳을 떠났을까? 기녀가 약속을 지키지 않을까 봐? 마침 택배가 와서? 중고나라에 원하던 물품이 떠서? 날짜를 잘못 세서? 날짜변경선이 선비와 기녀 사이에 있어 서로 착오를 하여?


1.
기다리는 사람은 기다림의 대상을 사랑한다.

2.
"나는 사랑하고 있는 걸까?ㅡ그래, 기다리고 있으니까." 그 사람, 그 사람은 결코 기다리지 않는다. 때로 나는 기다리지 않는 그 사람의 역할을 해보고 싶어 다른 일 때문에 바빠 늦게 도착하려고 애써본다. 그러나 이 내기에서 나는 항상 패자이다. 무슨 일을 하든 간에 나는 항상 시간이 있으며 정확하며 일찍 도착하기조차 한다. 사랑하는 사람의 숙명적인 정체는 기다리는 사람, 바로 그것이다.
- 롤랑 바르트,  <사랑의 단상> '기다림' 중에서

3.
선비는 왜 아흔아홉 번째 되던 날 밤 그곳을 떠났을까? 그것은 선비가 진정 원한 것이 '기녀의 사랑'이기 때문이다. 선비는 사랑을 원한 것이지 수락을 원한 것이 아니었다. 선비는 '기녀를 갖는 것'을 원한 게 아니라, '기녀가 자신을 사랑해주길' 원했다. 

4.
백일이 지나면, 기녀는 말한 대로 '선비의 사람'이 되어야 한다. 선비의 사랑은 이루어지는 것이지만, 기녀의 사랑이 성립되는 것이 아니다. 만일 기녀가 진정 선비를 사랑하게 되었다면, 기녀 역시 '기다리는 사람'이 되어 백일이 되기 전에 선비를 찾아갔을 것이다. 그러나 기녀는 그렇지 않았기에, 아흔아홉일이 되도록 '기다림의 대상'으로 남았다. 

기녀는 언제까지고 선비의 사랑을 '증명의 대상'으로 생각했다. 기녀가 가진 태도는 "나를 얼마만큼 사랑하는지 증명해봐, 그럼 나도 너를 사랑해줄게"였다. 여기서 사랑은 사랑이 아니다. 백일째 되는 날, 선비가 마주하는 기녀의 감정은 사랑이 아니라 동정에 가깝다. 

5.
만일 백일이라는 제한이 없었다면, 선비는 더 기다렸을 것이다. 기다리다 기녀가 선비를 사랑하게 될지, 선비가 기녀를 더 이상 사랑하지 않게 될지는 모르지만. 어찌 되었건 선비에게는 기녀의 사랑을 받을 가능성이 남은 상태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백일이라는 확실한 경계선의 존재가 선비의 결단을 이끌었다. 백일이 지나면 남는 것은 '백일의 약속' 뿐이다.

6.
조금 더 로맨틱한 관점에서 아흔아홉 번째 되는 날 선비가 가진 생각을 표현하면 다음과 같다.
"아흔아홉 날의 기다림으로 내 사랑은 충분히 증명하였소. 해가 뜨면 그대는 내 사람이 되겠지만, 혹 나를 사랑하지도 않으면서 백일의 약속으로 내게 다가오는 것은 원치 않소. 그것은 그대의 불행요. 그대의 불행은 나의 불행이기도 하오"

그리곤 버드나무 밑에 숨겨둔 통기타를 꺼내 김광진의 '편지'를 부르며 떠난 것이다.
"여기까지가 끝인가 보오. 이제 나는 돌아서겠소. 억지 노력으로 인연을 거슬러 괴롭히지는 않겠소~"

며칠 뒤 어느 주막에서 술에 잔뜩 취한 선비는 다음과 같은 말을 되뇌었다고 전해진다.
"아 ㅅㅂ ㄴㅃㄴ"

7.
네가 오기로 한 그 자리, 내가 미리 와 있는 이곳에서
문을 열고 들어오는 모든 사람이
너였다가
너였다가, 너 일 것이었다가
다시 문이 닫힌다
황지우, <너를 기다리는 동안> 중에서



대천해수욕장. 밤의 기다림. 대개는 수락만을 향함.


8. 
사랑과 수락은 다르다. 그런데 한쪽은 환상 같고 한쪽은 현실 같아서 다름을 구별 않고 두루뭉술 사는 게 보통이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