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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의 바다는 한없이 느리다

서산과 충남의 바다에서 가을을 지내며

by 유환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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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의 바다는 한없이 느리다. 한 걸음 내딛을 때마다 발끝이 부드럽게 꺼지고, 조용히 숨을 고르는 듯한 갯벌의 숨소리가 들린다. 바람은 차갑지 않다. 다만 여름이 완전히 물러간 자리에 남은 빈자리를 채우듯, 그 자리에 서늘한 리듬을 드리운다. 가을의 서해는 늘 이런 식으로 계절의 끝을 말한다. 화려하지 않고, 큰 사건 없이, 다만 천천히 식어가는 물결 속에서 한 시대가 저문다는 것을 알게 한다.


이 바다의 일상은 변화 속의 반복이다. 하루에도 여러 번 바다가 열리고 닫힌다. 바닷물은 밀려오며 삶의 흔적을 덮고, 썰물 때면 다시 그 모든 것이 드러난다. 누군가의 발자국, 물고기의 흔적, 바지락이 숨은 자국. 그 반복 속에서 사람들은 묘한 평화를 얻는다. 바다가 늘 움직이지만, 그 움직임조차 하나의 규칙으로 받아들여진다. 여기의 사람들은 물결을 막으려 하지 않는다. 그저 흐름에 맞춰 도구를 들고, 때를 기다리고, 그날의 일을 마친다.


나는 그 기다림의 풍경을 오래 바라보았다. 낚싯줄 끝에 아무것도 걸리지 않아도, 그들은 초조해하지 않았다. 파도의 리듬에 맞춰 앉고, 일어서는 그들의 몸짓은 묘하게 일정했다. 기다림은 이곳에서 하나의 노동이자 호흡이었다. 잡히는 것은 물고기가 아니라, 자신을 버티게 하는 인내였다. 기다림의 시간을 견디는 일, 그것이 서해의 삶이었다.


가을의 항구는 화려하지 않다. 여름의 소음이 사라진 자리엔 그저 느린 생활의 리듬만이 남는다. 물때를 보고 일정을 정하고, 파도를 보며 하루의 일을 예감한다. 누군가는 그 단조로움을 무료하다고 말하겠지만, 이곳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그것은 정확한 리듬이다. 도시의 삶이 분 단위로 쪼개지는 시간이라면, 이곳의 시간은 조류의 속도로 흐른다. 밀물과 썰물의 차이, 바람의 방향, 갈매기의 움직임이 오늘의 시계다.


어느 날은 바닷가에 나가 낙엽 하나가 물 위에 떠 있는 것을 보았다. 바람이 불 때마다 낙엽은 미세하게 방향을 틀었고, 어느새 멀리 흘러갔다. 그 단순한 움직임 속에서 나는 가을의 의미를 생각했다. 나무에서 떨어지는 순간부터 낙엽은 자신을 완전히 맡긴다. 어디로 흘러가든, 어떤 바람을 맞든, 그것이 더 이상 자신이 결정할 수 없는 일임을 안다. 어쩌면 우리 삶도 그렇지 않을까. 서해의 사람들도, 나도, 바다의 흐름에 몸을 맡긴 채 각자의 계절을 건너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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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산과 충남에서 한 달을 머물며 몸으로 경험했던 것들


한때 나는 파도를 타려 했다. 하지만 파도는 타는 것이 아니라, 받아들이는 것이었다. 파도는 늘 예측보다 늦거나 빠르고, 모양은 매번 다르다. 몸으로 그 차이를 견디는 순간, 나는 비로소 바다 위에 ‘있었다’. 흙을 만질 때의 감촉도 비슷했다. 흙은 내가 빚는 대로 움직이지 않는다. 힘을 주면 저항하고, 기다려주면 스스로 모양을 만든다. 물과 흙, 두 재료 모두 인간의 의도를 밀어내며 자연의 시간으로 되돌린다. 그것이 나를 겸손하게 했다.


이 가을, 나는 서해의 바다에서 ‘사는 법’을 배웠다. 그것은 무언가를 이루거나 얻는 방식이 아니라, 견디고 머무는 기술이었다. 바람이 바뀌면 방향을 틀고, 물이 빠지면 그 자리에 앉아 기다리는 일. 인생의 속도를 줄이고, 자연의 박자에 맞춰 호흡을 조정하는 일.


바다는 언제나 같은 자리에 있지만, 매일 다른 얼굴을 가진다. 그 변화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은 그 차이를 두려워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 차이 덕분에 오늘의 일을 시작할 이유를 얻는다. 바다는 모든 것을 주지도, 빼앗지도 않는다. 다만 있는 그대로의 리듬을 들려준다. 나는 그 리듬을 따라 걸었다.


가을의 서해는 말없이 가르친다. 삶이란, 결국 파도를 이기려는 싸움이 아니라, 파도에 실려 나아가는 일이라는 것을. 손끝으로 흙을 빚듯, 바람과 물살 속에서 조금씩 자기 모양을 찾아가는 일이라는 것을. 그리고 그 느린 변화의 끝에 도달했을 때, 비로소 한 계절이 지나갔음을 알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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