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을 기다리는 마음으로

군산 - 말랭이마을, 월명공원

by 유환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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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랭이마을에 도착한 첫날, 나는 짐을 풀자마자 마을의 윤곽부터 확인하고 싶어 밖으로 나왔다. 이곳에 한 달을 머문다는 것은, 단순히 방 하나를 빌리는 일이 아니라 하루의 시선과 리듬을 이 마을에 맡기는 일이기 때문이다. 골목은 생각보다 조용했고, 낮은 집들은 서로의 등을 기대듯 이어져 있었다. 바다와 가까운 도시 특유의 습한 공기가 겨울 초입의 차가움과 섞여, 군산 특유의 냄새를 만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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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랭이마을 사이 사이에 놓여있던 풍경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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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자연스럽게 월명공원으로 향했다. 말랭이마을에서 월명산으로 이어지는 오르막길은 숨을 조금씩 고르게 만들었다. 이 길을 앞으로 여러 번 오르게 되리라는 걸, 몸이 먼저 알아차리는 듯했다. 올라가는 동안 뒤를 돌아볼 때마다 마을의 지붕들이 차례로 낮아졌고, 그 너머로 군산의 원도심과 항구, 그리고 멀리 금강하구의 윤곽이 천천히 드러났다. 아직 잎을 떨구지 못한 나무들과 앙상해진 나무들 사이로 겨울 햇빛이 흘렀고, 그 빛은 차갑기보다는 담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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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랭이마을은 월명산에 둘러쌓여있다. 그래서 땅의 흔적이 많은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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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달 동안 내가 살펴보게 될 풍경들을 살펴본다. 말랭이마을의 골목, 중앙동과 월명동의 오래된 건물들, 항구 쪽으로 이어지는 산업의 흔적, 그리고 날이 맑으면 고군산군도 쪽으로 이어질 바다의 방향까지. 이 풍경들은 지금은 고요했지만, 눈이 내리는 순간 전혀 다른 표정을 드러낼 것이다. 나는 그 변화를 보기 위해 이곳에 왔다. 정확히 말하면, 눈 그 자체보다 눈을 기다리는 시간과 마음을 살기 위해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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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산의 겨울은 언제나 확실하지 않다. 폭설이 내릴 수도 있고, 끝내 눈 한 번 보지 못한 채 겨울이 흘러갈 수도 있다. 하지만 나는 이미 한 번, 이 도시에서 눈이 만들어낸 장면을 온몸으로 겪은 적이 있다. 2023년 연말, 60cm 가까운 눈이 쌓이던 밤, 군산 터미널에서 내려 중앙동과 월명동을 지나 나운동까지 홀로 폭설을 맞으며 밤을 새웠던 기억. 새벽이 되어도 멈추지 않던 눈, 그리고 곧장 향했던 고군산군도의 섬들. 그때의 군산은 도시라기보다 거대한 흰 풍경에 가까웠고, 그 경험은 내 작업 세계에 깊은 흔적으로 남았다.


그래서 이번 말랭이마을 한 달 살기는, 그 기억의 반복이 아니라 연장이다. 이번에는 서두르지 않는다. 밤을 새우며 셔터를 누르기보다, 아침에 눈을 뜨고 하늘을 먼저 살핀다. 오늘은 눈이 올 것 같은지, 바람의 방향은 어떤지, 바다는 어제보다 얼마나 낮아졌는지. 월명공원에 오르며 그날의 빛을 확인하고, 내려와 골목을 걷는다. 눈이 오지 않는 날에도 기록은 계속된다. 눈을 기다리는 도시의 표정 역시 겨울의 일부이기 때문이다.


아직 말랭이마을은 평온하다. 지붕 위에는 눈 대신 겨울 햇빛이 얹혀 있고, 골목에는 사람의 발자국보다 바람의 흔적이 먼저 남는다. 나는 이곳에서 한 달을 살며, 눈이 오든 오지 않든 군산의 겨울을 끝까지 지켜볼 생각이다. 눈을 보러 왔지만, 눈만을 바라보지는 않겠다. 눈을 기다리는 마음으로 살아가는 이 시간 자체가, 이번 기록의 출발점이자 가장 중요한 풍경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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