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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환희 Oct 01. 2015

존재

시기리야, 스리랑카


나는 스리랑카 여행에서 하이데거의 '존재와 시간'을 가져갔다. 양장본, 600p, 그리고 무려 1kg 정도 무게를 가진 책이다. 내 배낭의 무게를 공항에서 수화물 부칠때 재봤더니 13.7kg이었다. 이 책이 얼마나 큰 무게를 내 배낭에 얹혀줬는지 짐작이 가능할 것이다. 그런데 나는 한달간의 이 여행에서 이 책을 거의 읽지 못했다. 그저 무게와 공간만 축내는 짐짝이 된 이유는 그놈의 '존재'라는 단어 때문이었다. 존재와 시간을 펼치면 한 문장에 '존재'라는 단어가 한 세네번쯤 나온다. 존재를 계속 읽다보면 눈과 뇌가 따로 놀게되었다. 바로 전 페이지도 내가 읽었는지 인지하지 못할 사태에 빠져버렸다. '존재'라는 단어가 너무도 어렵게 다가왔다. 뇌가 존재하는지 의문을 가질 정도로...


그러다가 스리랑카 여행의 막바지에 시기리야를 갔다. 나는 입장료가 비싼 시기리야 안으로 들어가지는 않고, 시기리야를 조망할 수 있는 피두랑갈라 바위(Pidurangala rock)에 올랐다. 이 곳에 오른 이유는 오직 하나. 시기리야 바위에 오르면 시기리야를 볼 수 없다라는 아주 당연한 사실 때문이었다. 피두랑갈라 바위에 오르는 길은 조금 험했다. 바위엔 페인트로 화살표가 그려져 있었고 그냥 그 화살표를 따라 암벽등반하듯 바위를 잡고 올라서는 것이었다. 멀리보이는 시기리야의 관광객을 위한 계단같은 호의는 없었다. 그렇게 피두랑갈라 바위에 올라 시기리야를 딱 봤을 때, 나는 왜인지 크게 감탄을 하게 되었다. 정글 숲 위에 홀로 솟은 거대한 바위 하나. 실상 별 것 아닌데 나는 감탄사를 내질렀다. 설명할 수 없는 감탄이었다.



당신은 일찍이 사물이 존재하고 있다는 단순한 사실 그 자체에 마음을 빼앗긴 적이 있는가? 당신은 당신 자신에게 당신 앞의 한 인간이든 아니면 나의 꽃이든 아니면 한 알의 모래알이든 '그것이 거기에 존재한다!'(It is!)고 말해 본 적이 있는가? 그것들이 어떤 방식으로 있는지 그리고 그것들이 어떤 형태를 갖는지에는 전혀 관심을 갖지 않은 채 말이다. ...당신이 그러한 경험을 가진 적이 있었다면 당신은 당신의 정신을 경외와 경탄으로 사로잡는 어떤 신비의 현존을 느꼈을 것이다. - 콜리지(Coleridge)


우리는 과학 밖에 서 있다. 우리는 그 대신에 예를 들어서 꽃이 피어 있는 나무 앞에 서 있다. 그리고 그 나무는 우리 앞에 서 있다. 그것은 우리 앞에 자신을 세운다. 나무와 우리는 서로를 자신에게 세운다. 즉 나무는 거기에 서 있고 우리는 그것을 마주하고 서 있다. 서로의 앞에 세워지고 서로에 대한 관계에로 세워져서 나무와 우리는 '존재한다'. - 하이데거


"사람들은 흔히 존재라는 말이야말로 가장 보편적인 개념이기 때문에 내용을 결여한 공허한 개념이라고 생각한다. 사람들은 이러한 사실은 존재라는 말을 그때그때마다 보다 구체적인 의미를 갖는 다른 말로 바꿀 수 있다는 데서 드러난다고 생각한다. 예를 들어 '그 사람은 슈바벤 출신이다'는 '그가 슈바벤에서 태어났다'라는 말로 바꿀 수 있으며, '그 책은 네 것이다'는 '그 책이 너에게 속한다'라는 말로 바꿀 수 있고, '그 잔은 은제다'는 '그 잔은 은으로 만들어졌다'로 바꿀 수 있다.

그런데 존재라는 말을 다른 말로 도저히 대체할 수 없는 경우가 있다. 예를 들어 '모든 산봉우리에 정적이 있다'는 괴테의 시구를 우리는 '정적이 발견된다', '일어나고 있다', '머무르고 있다', '지배하고 있다', '놓여 있다', '주재하고 있다'로 도저히 바꿔 쓸 수 없다. 이 경우는 어떻게 바꿔 써도 적합하지 않다. 결국 우리는 '있다'(ist)라는 단어를 다른 말로 주해하는 것을 포기하고 그 시구를 반복해서 읽게 될 뿐이다. '모든 산봉우리에 정적이 있다.' 우리가 이 '있다'를 주해하려고 시도하지 않는 것은 그것에 대한 이해가 너무 복잡하고 어렵기 때문이 아니라 그 '있다'라는 단어가 너무도 소박하게 말해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러한 소박함은 희귀한 풍요로움과 충만함을 간직한 소박함이다." 


<들길의 사상가, 하이데거>, 박찬국, 26~34p



얼마 전, 나는 시기리야 사진을 두고 이런 글을 남겼다. "자연의 경우 유독 홀로 있는 것은 추앙의 대상이 된다. 거대한 산맥의 한 바위는 아무런 감흥을 주지 못하나, 드넓은 땅에서 우뚝 솟아있는 바위는 감탄의 대상이 된다. 호주의 울룰루가 그렇듯, 스리랑카의 시기리야도 그랬다. 이질감이 있는 그 무엇이."


나는 귀국을 하고도 무엇이 시기리야를 경외와 감탄의 대상이 되게 하는지 선명하게 인지하지 못했다. 그러다가 어젯밤 하이데거와 존재에 관한 책을 읽던 중 시선에 선명함을 안겨줄 구절을 발견했다. '나무는 우리 앞에 서 있다. 그것은 우리 앞에 자신을 세운다. 나무와 우리는 서로를 자신에게 세운다. 즉 나무는 거기에 서 있고 우리는 그것을 마주하고 서 있다. 서로의 앞에 세워지고 서로에 대한 관계에로 세워져서 나무와 우리는 존재한다.'


과학이 발전하고, 인류가 진보한다고 믿게 되면서 인간은 자연과 자신을 분리하여 인식하기 시작했다. 인간은 자연에 속해 있으면서도 자연을 대상화 시켰다. 통제하고 관리할 수 있는 대상으로 여겼다. 그 속에서 본질적으로 자연에 속한 인간마저도 대상화 된 것이다. 여기서 대상화란 '어떠한 사물을 일정한 의미를 가진 인식의 대상이 되게 함'(네이버 국어사전)을 뜻한다. 그 자체를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일정한 의미를 가진 인식의 대상'으로써 바라보는 것이다.


그러나 '존재'는 애초에 대상화하지 않더라도 존재한다. '(여기) 있다'라는 말은 중언부언할 필요없이 그냥 있는것이다. 설명을 하든 안하든 있다는 사실에 변화는 없다. 그런데 어느덧 우리는 '있다'라는 말에 의미를 부여해야만 하는 동물이 되었다. 스스로를 대상화 시켜버리듯 그 모든 것을 대상화시키는 존재가 되어버렸으니 말이다. 그래서 역설적으로 '존재'라는 단어가 지극히 어렵게 다가오게 되었다. 존재란 그냥 존재하는 것인데 존재에 의미를 부여하려고 하니 난관에 빠진 것이다.


하이데거가 말한대로 '나무는 우리 앞에 서있다', '우리는 나무 앞에 서있다', 그리고 '서로의 앞에 세워지고 서로에 대한 관계에로 세워져서 나무와 우리는 '존재한다'. 나무는 나에게 존재를 일깨운다. 마찬가지로 나 역시 나무에게 존재를 일깨운다. '서로를 자신에게 세운다.' 그로써 우리는 '존재함'을 느낀다. 그러나 인간은 위에서 말한대로 자연과 스스로를 분리하기 시작했다. 나무를 나무로 보는 것이 아니라 그저 땔감정도로나 인식하게 된 것이다. 대상화된 사물은 존재가치가 미비하다. 그래서 나무는 더이상 존재를 인식할 개념이 아니게 된 것이다. 과학이 발전하기 이전, 인류는 나무, 동물, 태양과 같은 것들을 '숭배'하였다. 그러나 현재 이러한 것을 숭배한다고 얘기하면 어디 선사시대에서 왔냐고 비웃음이나 당한다. 더 이상 자연을 숭배하지 않게 된 것은 자연을 대상화하였기 때문이다.


호주의 에보리진은 울룰루를 세상의 중심으로 조상들의 영혼이 모이는 신성한 곳으로 여겼다. 고대 싱할라족의 왕은 시기리야 정상에 궁전을 세웠고 모든 이는 이곳을 추종했다. 신성시 되는 무언가는 존재를 깨닫게 하는 것이다. 그리고 나는 울룰루와 시기리야를 보고 두번 다 숭고를 느꼈다. 대상화에 익숙한 인간도 아직 거대한 무언가엔 익숙해지지 못했다. 거대한 자연을 보면 비로소 '서로 자신에게 세워져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존재' 그 자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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