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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환희 Sep 29. 2015

fall is coming

교토, 일본


밤바람이 차다. 반팔, 반바지 차림으로 옥상을 올라가보니 차가움이 조금 낯설다. 시간은 여지없이 흘러 가을을 향하고 있다. 옷장에 묵혀둔 두툼한 옷을 꺼내듯, 계절의 이질감에 내팽겨쳐둔 단풍 사진을 꺼내본다. 작년 늦은 가을, 나는 일본에 있었다. 그리고 겨울이 다가올 무렵 네팔, 인도로 떠났다. 그곳은 여름이었고 다시 귀국했을 때는 한국도 여름에 가까워져 있었다. 따뜻함이 아닌 뜨거움이 느껴지는 시기에 일본에서 찍은 이런 붉은 사진들은 적절하지 못했다. 외장하드에 그냥 처박아둔채 색온도에 맞는 온도가 오기를 기다렸다. 시간은 무자비하게 빨리 흘러서 이제는 이 붉은 단풍이 어색하지 않은 시간이 되었다.


가을에서 다시 가을을 마주하니 지난 시간이 군데군데 비어있는 듯 하다. 작년 십일월, 십이월. 올해 일월, 이월, 삼월, 사월, 오월, 유월, 칠월, 팔월, 구월. 11개월의 흘러간 시간에서 그나마 살아있는건 대략 5개월간의 일본, 네팔, 인도, 스리랑카 여행의 기억이다. 아 서울에서 보낸 한달도 좀 생생하구나. 넉넉잡아서 6개월은 살아있는듯 한데, 남은 5개월은 도대체 어디로 사라졌을까? 그 5개월은 도통 내가 뭘 했는지 떠오르지 않는다. 아마 그냥 살아지는 시간이었나보다. 나는 이게 무섭다. 한 30년의 시간이 흘러서 과거를 돌아봤을 때, 도통 내가 그 시간에 무엇을 했는지 떠오르지 않는다면. 기억을 할 필요가 없는 시간들로 삶이 채워졌다면. 그때의 나는 얼마나 당혹스러울까.


지금 내가 기억하는 시간들은 대개 여행의 기억들이다. 이제는 그 여행마저도 과거처럼 선명하게 다가오진 않는다. 과거 여행의 기억이 생생하게 날뛰는 바닷속의 물고기였다면, 지금은 흐려지는 눈깔을 끼고 좌판에 누워있는 생선인 듯 하다. 물고기와 생선의 차이다. 조금 더 시간이 흐르면 살도 흐물흐물해지고 온몸에서 비린내가 진동하는, 마치 저 일상의 5개월 마냥 움츠러드는 기억으로 변질 되버릴 수도 있겠다.


하여간 시간은 흐른다. 하여간 다 변해간다. 가을이 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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