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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환희 Oct 13. 2015

타지마할(Taj Mahal)을 바라보며

아그라, 인도

화면을 보지 못하고 찍으니 대상이 자꾸 가운데로 몰리는 경향이 있다. 조금 더 틀면 아예 벗어날 것 같아 소심하게 축을 틀어서 그런 듯 하다. 일단 조금씩 옮기며 여러장을 찍어 걔 중 그나마 원하는 구도에 적합한 사진을 고르고 있는데, 편집하는 과정이 여간 불편한게 아니다. 업보다.


혹자는 타지마할은 진짜 인도가 아니라고 말한다. 이른바 '관광지'는 인도의 본질적인 모습에 동떨어져 있다고 여기는 태도다. 나도 한때는 그랬다. 아그라를 지나칠까 생각하기도 했는데, 타지마할의 모습을 보니 그냥 지나쳤으면 분명 후회할만한 기품이 있었다.


타지마할 주변엔 무슬림들이 많이 거주한다. 모스크도 꽤나 많아 하루 5번, 미나렛에서 퍼지는 아잔(무슬림의 기도시간을 알리는)을 들을 수 있다. 참 차분하게도 아잔 소리를 들었다. 아그라를 떠나는 날 쯤에는 그 아잔을 따라하는 내 모습을 보기도 했다. 정확한 발음도 모르면서 대충 얼버무리듯 부르긴 했지만.


힌두에선, 그리고 현재의 인도 역사 교육에선, 무굴제국 시대를 이른바 '잃어버린 시대'로 규정한다. 무슬림이 힌두의 본질을 망친 시기라고 여긴다. 그런데 인도를 상징하는 가장 큰 대상은 그 무굴제국의, 무슬림의 영광이니 아이러니 하다.


힌두만이 인도의 모습은 아니다. 요가나 영적 발견만이 인도의 모습도 아니다. 물질에서 벗어난 듯한 태도만이 인도의 모습이 아니다. 각기 다른 복장을 한 무슬림과 시크교도를 쉽게 만날 수 있다. 이곳 사람들은 현 모디정권에 꽤나 많은 기대를 가지고 있다. 개방과 자본의 흐름에 호응을 보내고 있는 것이다. 물론 그 모디가 힌두에 쏠려있어 이를 우려하는 타 종교인들도 있긴하지만.


나는 타지마할에서 오히려 인도의 모습을 보았다. '다양성 속의 통일성'


세상의 모든 것들은 상호의존적이다. 의식, 사건, 경험 등은 모두 무언가에 얽매여 있다. 그래서 인간은 상호의존적이지 않은 무언가를 찾으려 애를 쓰는 모양이다. 신은 그렇게 나왔다. 신은 자기의존적이다. 


가지 않으려 했던 곳에 서서 무언가 의미를 발견했을 때 늘상 떠오르는 한 친구의 말이 있다. 호주를 일년간 반바퀴를 돌고 마지막 도시로 시드니에 정착했을 때 룸메이트였던 독일 친구는 타즈매니아로 여행을 간다고 했다. 나에게 동행을 제안했던 그 친구에게 나는 이렇게 말했다.

"거 뭐 별거 있겠어?"

그러자 그 친구는 이렇게 말했다.

"가봤어?"

나는 그때 아무 대답도 하지 못했다. 본다한들 다 알지 못하는게 보통인데, 보지도 않고 당연한듯 아는 채를 했던 것이다.


뻔함은 늘 스스로가 만든다. 무언가를 발견하지 못하는 것도 익숙해진, 본 것만 보려는 내 눈의 잘못이다. 새롭고 특별한 것은 어디에도 있기 마련인데, 덤덤함에 퇴화된 눈은 갈피를 잡지 못하고 본 것 만을 따른다. 길어진 여행에서 나는 무언가와 비교하는데 익숙해졌다. 있는 그대로 보려하는게 아니라 스스로 순위를 매긴다. 대개는 순위에 오르지도 못한다. 처음 여행을 했을 때의 그 순수한 눈을 넘어서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아주 새롭기만 했던 그 눈을 따라가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나는 본다. 더 높은 순위를 찾으려는게 아니라, 그때의 순수했던 퇴화되기 이전의 눈을 다시 얻기를 바라면서. 혹은 그 눈을 넘어서길 바라면서.


보지 않고 찍는 카메라가 그 눈을 찾는데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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