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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환희 Oct 22. 2015

낯선 사람에게 꽃 한송이를

노량진 시장, 서울

자정, 노량진 시장


1.

어떤 선물은 실용적이다. 어떤 선물은 여백이 있다. 실용적인 선물은 일상을 함께한다. 여백이 있는 선물은 환상을 함께한다. 나는 멋이 없는 지극히 실용적인 인간이기에 선물마저도 가장 실용적이어야 한다고 여긴다. 그래서 꽃이라는, 실상 아무  쓸데없는 선물을 하는 경우는 없다.(작은 화분은 키우기라도 하지, 꽃은 시드는 것 밖에 남아있지 않다) 내게 꽃을 선물해주는 이에게도 가끔 투덜대기도 한다. "이걸 왜 샀어?. 차라리..."


2.

요즘 듣고 있는 교육의 첫 수업이 끝나면서 강사는 수강생들에게 꽃을 하나씩 선물했다. 그리곤 미션을 주었다. "낯선 사람에게 꽃 한송이를 선물하라" 강사는 이것을 '경험에 대한 선물'이라 말했다. 낯선 사람에게 다가가는 용기. 꽃을 준다는 설렘. 그리고 낯선 사람에게 꽃을 준다는 또 다른 의미. 색다른 선물이었다. 누군가에게 주기 위한 선물. 


나는 일단 숭례문까지 걸었다. 꽃 때문만에 걸은 것은 아니었다. 그냥 걷고 싶었다. 걷다가 우연찮게 꽃을 주고 싶은 사람을 발견하면 주어야지 하는 생각만 들었을 뿐이다. 가는 길엔 카페가 보였다. 창가 자리엔 커플이 앉아 밤 늦은 시간의 정겨움을 누리고 있었다. 나는 그 커플의 여자에게 다가가 3초간 지긋히 눈을 마주치다 꽃을 두고 바로 돌아서 나오는 상상을 해봤다. 내 다리는 좀 튼튼하니까 커플 남자에게 멱살을 잡히지 않고 도망갈 자신도 있었다. 그러나 실행에 옮기지 못한 것은 꽃 한송이가 부여할 충격의 여파를 그릴 수 있었기 때문이다. 질투와 오해와 혼란이 가득한 꽃 한송이였다. 물론 커플을 파멸로 몰고갈 '색다른 경험'임에는 분명했다.


3.

숭례문을 지나 어디로 향할지 고민하고 있을 때, 버스 정류장이 보였다. 런던 여행이 떠올랐다. 나는 런던에서 가끔 아무 버스나 타고 아무데서나 내렸다. 그 목적에 대한 불분명함이 주는 즐거움을 또 한번 누리고자 버스 정류장에 처음으로 오는 버스를 탔다. 그리곤 맨 뒤에 앉아 어디서 내릴지 고민하며 창밖을 기웃거렸다. "다음 정류장은  노량진역입니다"라는 안내 방송이 나왔다.


노량진역에 도착한 시각은 밤 11시 무렵. 주변엔 밤 늦게까지 공부하고 귀가하는 학생 혹은 취준생들로 가득했다. 그 사이에 미동조차 않고 쓰러져있는 걸인이 보였다. 꽃을 파는 노점 아주머니도 보였다. 꽃을 팔기만 했지 선물 받아본 적이 있을까하는 생각이 스쳤다. 폐지를 줍는 할아버지가 보였다. 하루 일과를 마치고 버스에서 내리는 아주머니도 보였다. 공간엔 서로 다른 이야기와 표정을 가진 사람들로 가득했다. 꽃을 주는 대상을 선정하는 것은 내 주변의 스쳐지나 가는 사람들에 대한 관심이었다. 그렇게 돌고 돌다 다시 걸인이 떠올랐다. 기대를 안고 사는 이들 속에 기대를 버린 이. 동전 두어 개가 담겨있던 그릇에 꽃 한송이를 놓아두고 싶었다. 돈이 궁한 이에게 꽃이 무슨 의미가 있을지 생각이 되기도 했지만, 꽃이라는 여백이 어쩌면 다른 의미를 부여할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들었다. 나는 그가 있던 육교로 향했다. 그러나 육교의 계단을 올랐을 때, 걸인은 보이지 않았다.


4.

나는 꽃을 들고 다시 노량진역 주변을 서성였다. 가득했던 사람들은 시간과 함께 흘러간  듯했다. 하루가 마무리됨을 스쳐지나 가는 사람들 속에서 느꼈다. 그러다 문득 노량진 수산시장이 떠올랐다. 그곳은 다시 하루가 시작되는 곳이니 꽃 선물도 더 생기를 가질 수 있을 것 같았다. 소매시장은 사람이 가장 많이 다니는 앞 코너를 제외하고는 모두 마감을 한 상태였다. 그러나 그 뒤편 도매시장에선 노량진 수산시장으로 들어온 물건을 가져가려 각지에서 올라온 상인들로 붐볐다. 나는 그 생선박스 사이를 서성이며 사람들을 관찰했다. 누군가는 하루의 피로가 가득했고, 누군가는 덤덤함이 묻어났고, 누군가는 더 좋은 생선을 고르기 위해 눈을 반짝이고 있었다. 그렇게 '수산시장'의 흐름에 주목하고 있을 때, 생선들 사이로 머리에 큰 쟁반을 얹고 밥을 배달하는 아주머니가 보였다.


5.

모두들 '생선'을 보러 수산시장에 간다. 수산시장의 주인공은 신선한 생선이다. 이 주인공을 돕는 조연은 수산시장에 자리를 내고 생선을 판매하는 이들이다. 꽤나 비중 있는 조연이다. 그리고 이 비중 있는 조연을 돕는 이는 바로 이곳에서 청소를 하거나 밥을 짓거나 커피를 파는 이들이다. 이들은 주인공으로 서지 않는다. 그저 묵묵히 자신의 일을 하며 매우 바쁘게 움직일 뿐이다. 나는 아주머니를 따라갔다. 아주머니는 매우 빨라 보통 걸음으로는 따라잡을 수 없었고, 간신히 마주쳤을 때는 이미 밥 배달을 마치고 다시 돌아가는 때였다. 나는 아주머니에게 꽃을 드리겠다라고 말을 하면서 2시간을 들고 다니던 꽃을 내밀었다. 아주머니는 그런 나를 보고  당혹스러워하시더니 "왜요?"라는 대답을 먼저 하신다. 경계가 우선이다. 사실 자정이 넘은 시간에 갑자기 꽃을 주는 청년을 만나면 당황할  수밖에 없다. 솔직히 내가 이상한 놈 맞다. 나는 그 당혹스러운 경계를 깨기 위해 재빨리 말한다. "오늘 하루 고생하시고 계시니까 드리는 거예요." 아주머니는 빠르게 "고마워요"라는 말을 내뱉고 바로 돌아서 갈길을 가셨다. 나는 그 사이 아주머니의 옅은 미소를 보았다. 


6.

낯선 사람에게 꽃 한송이를 준다는 것. 그것은 무의미하게 스쳐지나 가는 듯 한 타인에 대한 관심이다. 그것은 모두가 각자의 삶에 이야기를 가지고 있는 주인공이라는 발견이다.


7.

나는 경험을 선물 받았다. 그리고 그 속에서 내 의미 역시 누군가에게 소중한 경험으로 내어줄 수 있다는 생각을 가지게 되었다. 경험을  선물한다는 것은 간접적이다. 무엇을 하라, 무엇을 느껴라라고 강요하지 않는다. 전혀 다른 관점을 가지고 있어도 상관없다. 경험은 각자에게 맞는 이야기를 가지게 한다. 


8.

나는 여행은 모든 것을 혼자 꾸려나가야 된다고 여기는 사람이다. 그렇게 해야만 가장 많은 것을 발견할 수 있다고 믿는다. 그래서 내 방식의 여행을 누군가에게 조언하는 것도 주저하였다. 내 여행은 내 여행이고 타인의 여행은 타인이 알아서 만들어야 했기 때문이다. 이건 일종의 여행에 대한 내 신념이다. 나는 한때 여행 큐레이터가 되는 건 어떠할까 생각을 했는데, 여행을 하다 보니 이는 내 여행에 대한 신념과 완전히 상반된 것이라 여겨져 멀리했다. 그러나 이 '경험을 선물 받는 과정'에서 내가 가진 여행에 대한 신념과 타인에게 여행을 알리는 과정 간의 접점을 찾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다시 가지게 되었다. 경험을 선물한다는 것은 다시 말하지만 '간접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내게 의미 있었던 경험을 타인은 또 다른 각도로 누릴 수 있기 때문이다. 어쩌면 이 '경험에 대한 선물'이 앞을 위한 실마리가 될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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