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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환희 Oct 26. 2015

과거 사진

꼴람, 인도

의도적으로 이렇게 찍은 것은 아니다. 액정을 볼 수 없는 성스러운 카메라의 특성상 찍고 확인해보니 ISO설정이 12800으로 되어있음을 발견했을 뿐이다. 한밤중에도 그정도로 ISO를 올리는 경우는 없는데, 대낮에 그렇게 올려놓고 사진을 찍었다. 결국 사진은 다 망쳤다. 그런데 분위기는 오히려 더 살았다. 마치 시간여행을 한 듯 하다. 내가 태어나기도 전에 찍은 사진들을 보는 듯 하다.


꼴람(Kollam)은 내가 좋아하는 케랄라 주에서도 가장 좋아하는 동네다. 특별한 관광지는 아니고 이곳과 알레피를 잇는 수로유람의 출발 혹은 종료의 지점이 되는 곳일뿐이다. 그러나 나는 그 수로유람을 벗어나 이곳 사람들이 사는 모습자체가 참 좋았다. 무엇이라 딱히 설명할 수는 없지만 그냥 그 자체로 좋았다. 설명을 할 수 없는 선호는 일상에서도 관계에서도 그리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 있지 않는가? 어찌되었건 꼴람은 16세기부터 포르투갈, 네덜란드, 영국등의 지배를 계속해서 받던 곳이다. 때문에 이곳 주민들은 대부분 천주교 신자이며, 동네에는 힌두교 사원이 아닌 카톨릭 성당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하얀 옷을 입은 수녀들도 그리 어렵지 않게 만날 수 있다.


아마 이렇게 찍혀버린 사진이라 느낌이 더 살아난 것일지도 모르겠다. 오토바이와 오토릭샤 그리고 수많은 간판들의 모습은 인도의 현재인데, 사진의 질감은 훨씬 과거의 것이다. 내가 꼴람에서 받았던 느낌은 이 사진의 질감과 흡사하다. 풍경은 그렇지 않았는데...그냥 느낌이 그랬다. 온전한 이방인. 인도땅에 첫발을 내딛은 바스코 다 가마 같은...


도로 한편엔 과일을 주렁주렁 매달고 손님을 기다리고 있고


그 맞은편엔 영화 포스터가 관객의 눈길을 기다리고 있다.


택시는 사진의 질감과 가장 잘 어울린다.


아마 꼴람을 내 가슴 속에 깊게 박아놓은 것은 농산물 시장 때문일 것이다. 무심한 듯 본연의 삶을 사는 시장 상인들과, 그 사이사이로 낯선 이방인에게 관심을 주는 시장 손님들. 덩그라니 놓여있는 정물들.


그리고 주렁주렁 달려있거나 혹은 너저분하게 방치되어있는 바나나 더미들. 바나나는 원래 파랗고, 노랗고, 초록이고, 주황이고, 빨갛고...크고, 작고 다양하다.


남인도 남성 패션의 기본은 상의 셔츠와 하의 도티, 그리고 쪼리이다. 도티는 더울땐 그냥 길게 내리고, 더 더울땐 사진처럼 위로 올려 미니스커트처럼 입는다. 아! 도티는 일종의 치마다. 그리고 대개 그 속엔 아무것도 없다. 가끔 도티를 올렸다 내렸다 하는데...


자전거는 출퇴근용이려나. 아저씨는 바나나를 파는데는 도통 관심없는듯 멍하니 기대어 있었다. 눈을 감지도 않고 그저 멍하니 있었다. 옆집 바나나 아저씨는 열심히 장사를 하고 있었는데 말이다. 매달려있는 바나나도 그리 풍성하지 않다. 빈곳이 가득하다. 바나나 판매는 일종의 변명인듯 싶었다. 그저 하루를 때워야하는데 아무것도 안하기엔, 혹은 직업란을 채울만한게 없어서, 일단 바나나 상점을 열었다랄까. 물론 이건 스쳐지나가는 여행자의 상상일 뿐이다....


혹은...


이쯤에서 다른 상상과 비슷한 노래를 들어보자. 이영훈의 가만히 당신을. 바나나 아저씨의 마음을 담았다. 


참고로 <가만히 당신을>의 가사는 다음과 같다


하루 하루 자라나는 그리움 같은

검은 머리 곱게 빗고서

바람 없는 마음 한 켠에

피어 오르는 빨간 꽃


가만히 당신을 생각하면 생각하면

가만히 당신을 생각하면 생각하면


생각하다가 또 결국 오지 않을

당신을 기다리다가


부은 눈을 한 번 두 번 깜박거리다

이내 잠에 겨운 듯


가만히 당신을 생각하면 생각하면

가만히 당신을 생각하면 생각하면

가만히 당신을 생각하면 생각하면

가만히 당신을 생각하면 생각하면


생각하다가 또 결국 오지 않을

당신을 기다리다가


나는 이내 허기진 배를 채우려

다 식어 버린 밥을 먹는 둥 마는 둥


바나나 아저씨의 시선엔 저 빨간사리의 아주머니가 있었다는 얘기는 따로 할 필요가 없을 것 같다.


<가만히 당신을>의 가사를 잘 살펴보면 마치 손님을 기다리는 상인의 심정과도 같다.

바나나 아저씨가 빨간사리 아주머니를 보며 했을법한 생각이다. '다 식어 버린 밥'이란 가사를 '다 익어버린 바나나'로 바꾸면 되겠다.


꼴람은 바나나 가격도 싸지만 향신료 가격도 무척이나 싸다. 혹시 인도에서 향신료를 구입할 계획이 있다면 꼴람에서 구입하는 것이 상당히 좋은 선택이다. 아 캐슈넛도 싸다. 의외로 쇼핑 천국이다.


케랄라주엔 복권에 관심있는 사람이 많다. 케랄라의 경제에 관해서는 기회가 된다면 하나의 포스트를 올릴 것이다. 케랄라주는 인도에서 가장 잘살고 평균수명이 높은 주이다. 거리를 거닐어보면 인도의 다른 주와는 달리 확실히 깨끗하고 더 개발되어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특히 서민 삶의 질이 대단히 높다는 것을 몸으로 느낄 수 있다. 비슷한 규모의 북인도 마을과는 크게 차이가 난다. 대중교통에서도 마찬가지이고.


야자수는 누군가에겐 로망이지만 누군가에겐 그저 지천에 깔린 흔한 나무일 뿐이다. 마치 우리 주변에 흔하게 볼 수 있는 소나무처럼. 태국의 푸끄라등 국립공원은 태국 대학생들이 MT장소로 많이 찾는 곳이다. 태국 친구에게 태국의 산에 대해서 물었을 때 이 푸꾸라등을 추천해주며 사진을 보여줬는데...아뿔싸 소나무더라. 그는 그 소나무를 내게 보여주며 참 멋있지 않냐며 감탄하곤 했다. 우리에게 야자수가 이국적이듯, 태국인들에게는 소나무가 이국적인 것이다. 남인도인들도 그리 다르진 않으리라.


꼴람에도 해변이 있다.


그러나 몸을 담그는 해변은 아니더라. 들어가는 길에 경고판이 있었다. 그 경고판에는 "지난 9년간 이곳에서 43명이 실종되었다"라고 적혀있었다. 사망이 아니라 실종이다. 이곳의 파도는 워낙 쎄서 모래가 덩어리채 휩쓸려간다. 내가 본 파도는 한 3미터쯤 된 듯 했다. 그 기세로 사람마저 휩쓸어가는 것이다. 해수욕하기 상당히 위험한 곳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모두 멍하니 해변에서 해가 지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몇몇은 이곳의 유일한 외국인인 나를 관람하기도 했었다.(물론 몇초 관람하다 별 볼것없는걸 알았는지 바로 바다로 눈길을 돌리긴 했다)


그저 멍하니 바다를 구경하는 해변은 상인들에겐 참 좋은 곳이다.


온갖종류의 리어카 노점이 있었다.


그리고 그 뒤로는 연을 파는 상인이 있더라. 연은 해질무렵 하늘 위를 유유히 휘저었다. 이 공간에서 유일하게 동적인 것은 파도와 연 뿐이었다. 리어카 노점상 아저씨도, 연을 날리는 아이도, 사진을 찍는 나도 묘하게 멈춰있는 듯 했다. 파도와 연만 현재고 나머지는 다 과거인 것처럼.




'주체가 된다'는 것은 말의 엄격한 의미에서 자기행위의 반성적 주체가 되고, 타자와의 관계에서 성찰적 주체가 되며, 그리하여 자기태도의 이성적 주체가 된다는 것이다. 

- 문광훈, 심미주의 선언, 124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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