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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민주 May 11. 2023

최여사 일기

슈퍼맨 팬티

   화장실에서 달그락 거리며 양치질 하던 어머니 몸이 문턱에 반쯤 걸쳐졌다. 또 혈관이 막힌 모양이다. 어머니는 소뇌로 향하는 혈관이 가늘고, 과부하 시 일시적으로 운동시경이 마비된다. 굳는 것이 아니라 풀어져 순식간에 무너져 버린다. 고혈압에서 비롯된 이 증상은 혈압이 갑자기 오를 때 나타나는 것 같다. 길을 가다가도, 밭을 매다가도, 노인정에서 놀다가도 일어나는 현상이다. 다행한 것은 안정되면 서서히 일어난다는 것이다. 어버이날이라도 아들들이 찾아오자 감정이 격해진 탓인지 그예 또 쓰러졌다. 


  근육이 순간 이완되면서 생기는 현상 중 대표적인 것은 실뇨, 실변이다. 노골적 표현으로 똥오줌을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내지른다. 상태에 따라 바로 나타나기도 하고, 움직이지 못하는 상황 때문에 알면서도 할 수밖에 없을 때도 있다. 병세가 나타난지 십년이 다 되어가는지라 당신이나 가족들은 모두 그 증상을 익히 알고 있다.  집으로 모셔온 뒤로는 그런 증상이 보이면 양해를 구하고 기저귀를 채우는데 이게 보통 일이 아니다. 


  이부자리와 옷가지를 다 버리는 것을 알면서도 기저귀사용을 거부한다. 도대체 그 마음을 알다가도 모르겠다. 며느리에 의해 기저귀를 채워지는 수치심이 온 집안을 모두 청소하고 빨래해야하는 며느리에 대한 미안함보다 더 크게 느끼는 모양이었다. 아니면 똥, 오줌을 싸는 창피함이 기저귀를 차는 수치심을 넘어서지 못하는 것일까. 


  어머니는 간곡한 나의 부탁에도 기저귀 사용에 제동을 건다. 손가락 하나 움직이기 힘든 상황임에도 ‘놔둬라, 내가 한다.’며 손사래를 친다. 겨우 설득하여 기저귀를 채웠다. 생각해보면 내가 그 입장이라도 싫을 것이다. 하지만 감정만 내세울 수 없는 노릇 아닌가? 똥오줌을 지려 난장판이 된 모습을 보이는 게 더 싫지 않을까? 그것도 개인의 차이일까?


  저녁상을 드리다가 희귀한 광경을 보고야 말았다. 빨간 내복 위에 입은 하얀 기저귀. 머리가 하얀 슈퍼맨이 자리에 누워 화들짝 놀란다. 더듬어 보면 며느리가 기저귀를 입힌 후, 기분이 상한 어머니는 온 힘을 다 모아 기저귀를 벗어던졌다. 그러나 늘 그랬던 오줌을 싸고야 말았다. 그제서야 며느리의 지청구가 걱정된 어머니는 완전범죄를 노렸다. 애초에 벗지 않은 것처럼 입으면 그만이었다.


  인지력이 떨어진 어머니의 간절한 노력은 내복을 벗지 못하고 급히 입은 팬티 때문에 들통나고 말았다. 옷을 갈아입히며 물었다. 기저귀 때문에 창피하냐? 늘 그랬기에 부탁드린 건 데 며느리 말 듣는 게 자존심 상하냐 했더니 “나는 며느리 말 듣는 게 싫다. 으야노!”한다. 정신이 맑을 때 한 말이 생각났다.

  “시어미가 며느리 나무라지. 며느리가 시어미한테 이래라 저래라 하는 법은 없니라.” 


설사 시어머니의 잘못된 처사가 있더라도 입 다물라는 뜻이다. 어쩌란 말이냐. 대한민국 시어머니 근성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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