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천지 엄마 있는 사람이 제일 부러운 순간들
나는 엄마가 없다. 엄마를 있다, 없다는 이분법으로 정의한다는 게 허무할 때가 많지만 결국 나는 엄마가 안 계시다. 고인을 뜻하는 말들이 참 많은데 유명을 달리했다, 세상을 뒤로했다, 하늘에 별이 되었다 등 말이다. 그러나 서른이 한참 지난 지금에서도 가장 먹먹해지는 건 가족관계증명서에 나오는 엄마의 ’ 사망‘이라는 두 글자다. 이 두 글자에 강한 감정을 느끼는 거 보면 사회 관념 상 아직도 죽음이라는 명제는 금기시되거나 암묵적으로 거부되는 걸지도 모르겠다.
자그마치 8년을 투병하시다 떠나시면서 가족들은 엄마와 천천히 조금씩 이별했다. 그게 어디 행운이라고 해야 하나, 불행 중 다행이라고 해야 하는지 모르겠지만 우리에게 엄마의 부재는 늘 몇 번을 곱씹어 본 시나리오다. 그럼에도 엄마의 부재는 결코 무뎌지지 않는 깊은 눈물의 현실이다. 초연하게 삶을 살다가도 엄마가 좋아하던 화려한 장미를 보면 속절없이 먹먹해지고, 잊은 듯 살다가도 엄마와 통화하는 이의 모습을 보곤 나도 엄마 품에 마구 파고들어 안기고 싶어지는 순간들.
입 밖으로 뱉어 부른 '엄마'라는 이가 없다는 것.
듣는 이 없이 허공에서 흩어지는 '엄마'라는 말
막상 내가 아기를 낳고 나니 제일 많이 듣는 말도, 많이 하는 말도 바로 '엄마'다.
"엄마가 도와줄까?"
"엄마 무릎에 앉아서 같이 보자"
"엄마한테 가지고 오면 뜯어줄게"
10년을 넘게 그리워한 엄마란 이름이 이제 나에게 고스란히 물들었다. 아기를 낳고 나니 엄마를 향한 그리움은 말로 형언할 수 없이 커져만 갔다. 아기의 개월 수가 올라갈수록 육아 레벨도 함께 올라갔고, 그럴수록 나도 엄마 품에 어린아이처럼 안겨 토닥거림을 받고 싶어 졌다.
지나가는 말로 "세상천지 엄마 있는 사람이 제일 부러워"라고 하곤 했다. 결혼하고 남편의 직업 특성 때문에 우리 가족은 이사가 잦다. 그래서 친정과도 거리가 꽤 되기도 했고, 한동안은 출산 직후라 더더욱 친정을 못하기도 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아버지가 살고 계신 집은 생전에 엄마와 함께 지냈던 곳이 아니라, 할머니가 사시던 집이다. 엄마가 돌아가시고 얼마 지나지 않아 할아버지도 떠나시면서, 홀로 계신 할머니를 모시기 위해 아빠가 그 댁으로 들어가신 거다. 그래서 지금 아버지가 홀로 계신 집은 어딘지 모르게 친정집이라는 아늑하고 편안함보다는 여전히 할머니댁에 온 것 같은 약간의 불편함이 공존한다. 물론 만약 그 집에 엄마가 계시다면 얘기는 달라지겠지만... 하여튼 나에게 드러눕고 싶은 마구 편안 친정집, 혹은 온갖 추억이 깃든 본가는 없다는 사실은 변함이 없다.
생전 나의 엄마는 다소 과묵하고 차가운 첫인상을 풍겼다. 이는 쑥스러움이 많고 표현이 서툰데 비해 말투가 부드럽지 않아서일 것이다. 어릴 때는 그런 엄마가 호랑이처럼 엄하고 무섭다고 느꼈다. 하지만 클수록 엄마처럼 소녀같이 순수하고 정이 많은 사람도 없다는 걸 알았다. 그걸 알아차리고 엄마를 바라보는 시각이 조금 달라졌다. 어릴 때는 혼날까 봐 무서워 엄마의 눈치를 봤던 편이라면, 엄마를 바라보는 시각이 달라진 뒤에는 엄마를 놀리고 지켜주고 싶어 하는 마음이 커졌달까. 하지만 그렇게 바라보기 시작한 무렵 몇 해 지나지 않아 엄마는 세상을 뒤로했다. 참 소녀 같았던 나의 엄마는 남에게 참 잘 퍼주는 정이 많은 분이셨다. 엄마가 새로운 재킷을 사서 입고 계실 때면 내가 지나가는 말로 '오 엄마 재킷 이쁜데?'라고 말이라도 꺼내면 기다렸다는 듯 '너 입을래?'라며 옷을 건넸다. 나는 그렇게 칭찬을 건네면 소녀처럼 쑥스럽게 웃는 엄마가 귀여워서 했던 말이었는데, 엄마 본인은 늘 자기 몫을 가족들에게 참 주고 싶어 하셨다.
막상 내가 엄마가 되어보니 참 엄마의 마음이 절로 이해가 됐던 날들이 많다. 나는 딸기를 정말 좋아한다. 아니 사랑한다. 딸기 500g 한 팩을 그 자리에서 혼자 다 먹어치워 버릴 만큼. 그런 나를 닮은 아들 역시 딸기를 참 좋아한다. 금딸기라 불릴 만큼 첫 수확 딸기가 나올 때면 정말이지 먹음직스럽게 생긴 딸기를 눈앞에 두고도 안 먹게 되었다. 아들이 딸기를 게 눈 감추듯 먹어치우는 모습을 보자니 차마 한 알이라도 먹을 수가 없는 거다. 뿐만 아니라 새우도 정말 좋아하는데, 나의 아들 역시 새우라면 환장한다. 밥 먹자고 부르면 오지 않아도, 새우 먹자 하면 쪼르르 달려올 정도이니 말이다. 내 몫까지 요리해도 자기 몫 다 먹어치우고 내 새우 쳐다보는 아들을 보면 그저 다 퍼주고 꺼내 주고 싶을 정도다.
'아 나의 엄마도 이런 맘이었겠구나'
엄마도 알려주지 않았고, 그 누구도 알려주지 않았지만 저절로 그렇게 느껴지는 마음
그 옛날 나의 엄마가 말하지 않았던 그 마음을 더듬거리며 손 떼 묻는 그녀의 사랑을 그렇게라도 느껴본다.
내 지난 20년이라는 짧은 삶에서 엄마는 10년이 넘도록 치열하게 삶을 살며 가족을 일군 사람이고
그 치열함의 혹독한 대가로 8년은 아픈 사람이었다. 그 시절 나는 가난한 학생이었고, 코 뜨고 코 베일만큼 순진하고 풋내 나는 청춘이었다. 고운 옷 한 벌, 좋은 가방, 환갑 여행 같은 남의 집 자식들이 다 해준다는 호사 한 번 누리지 못하고 떠난 엄마는 고작 50세였다. 그런 엄마가 너무 가여워 오늘도 마음껏 그녀를 떠올리며 추억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