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년 넘게 지켜온 규칙이 있었다.
아들에게 언제 PC를 사주었는지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초등학교 고학년이 되면서 아들은 게임에 심취하기 시작했고,
아들에게 PC를 사주게 되면서 한 가지 철칙을 세웠다.
PC를 아들 방에 두지 않기!
아들은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개인 PC를 사주는 조건으로 함께 세운 규칙이었다.
일주일에 3회, 1회 2시간 넘지 않기, 거실에 아빠 컴퓨터와 함께 배치하기, 폭력/야동 관련 영상 보지 않기 등
아들과 함께 규칙을 세우고, 함께 지키기로 했다.
내 컴과 아들 컴을 나란히 거실에 배치하니, 여러 가지 상황이 발생한다.
아들이 가끔 친구들을 불러와서 2-3명이 함께 게임을 하기도 하고(PC방 가는 횟수를 줄일 수 있음),
가족 끼리긴 하지만 오픈된 장소에서의 PC 사용이기 때문에 스스로 조심해서 사용하게 되는 장점이 있다.
아내는 거실이 지저분해지고, 창문이 보이는 공간을 활용할 수 없다는 푸념과 함께
덩치 큰 남자 2명이 매일 거실 창문 쪽을 차지하고 있으니 빛도 가리고 답답하다는 의견이었다.
지난 몇 년간 아들은 PC를 방에 들이기 위해 몇 번 시도했다.
'절대 시간을 엄수하고 사용하겠다.
폭력/음란물을 보지 않겠다.
공부에 방해되지 않게 하겠다.'
여러 가지 이유를 둘러댔지만 함께 합의하고 결정하는 순간에는 결국 뜻을 굽혔다.
아들은 대학입시 과정을 모두 끝내고 나서야 PC를 방으로 들였다.
아들 PC는 아들방에, 내 PC는 안방으로 이사했다.
그동안 나도 강의 촬영이나 실시간으로 강의할 때, 어쩔 수 없이 노트북으로 방에서 강의하곤 했는데,
PC가 방으로 들어오니 강의 촬영도 실시간 강의도 눈치 보지 않고 원하는 시간에 할 수 있게 되었다.
아들은 아들 나름대로 밤새도록 게임을 하기도 하고 원하는 대로 PC를 사용하는 것 같았다.
고등학교 3년 동안 억눌렸던 시간이 폭발했는지 대학 입학 전까지 대략 2-3개월 동안 아들방은 개인 PC방이 되었다.
밤늦도록 불이 꺼지지 않았고, 정오가 되어서야 눈을 뜨는 나날이 이어졌다.
아내는 저렇게 두어도 되냐고 걱정했지만, 나는 괜찮다고 기다리라고 했다.
'그동안 얼마나 하고 싶었을까!
일생에 한번 정도 저런 시간도 있어야지.
대학 가면 또다시 경쟁이 시작될 텐데, 잠시 원하는 대로 즐기도록 시간을 주자.'
그렇게 폭주하던 아들은 대학 입학일이 다가오자 점차 원래 일상으로 돌아왔다.
나는 지난 몇 년 동안 거실에 PC를 두고 함께 노력했던 시간이 헛되지 않았다고 본다.
요즘 아이들에게 게임만큼 재미있는 일이 많지 않다.
게임을 금할 수 없다면 바르게 즐기는 법을 알려주어야 한다.
아들은 2-3년마다 PC를 바꾸었는데, 그때마다 아들이 직접 사양을 고르고, 그래픽카드를 구입해서 업그레이드하는 등 스스로 결정했다. 내가 상한 금액을 제시하면 아들이 거기에 맞춰 사양을 고르는 방식이었다. 듀얼 모니터도 아들에게 양보해서 게임할 때 최대한 불편함을 느끼지 않게 배려했다.
PC를 새로 장만할 때마다, 새해가 될 때마다, 규칙이 잘 지켜지지 않을 때마다 다시 규칙을 합의하고 수정하는 일이 반복되었지만 모든 결정은 아들이 스스로 내리도록 했다.
스스로 결정하고 그 결과도 책임지라는 의미였다.
교육 분야나 심리학에서는 '자기 결정성'이라고 한다. 인간은 스스로 결정한 사항에 대해서는 지키려고 하고 책임지려고 하는 성향을 있다고 한다.
아들의 성격 탓도 있지만 집의 PC 사양이 그럭저럭 사용할 만하니, 다른 아이들보다 PC방에 가는 횟수가 적었다.
상대적으로 거실에서 게임하는 모습을 눈앞에서 계속 보게 되니, 아들의 뒤통수를 치면서 들어가서 공부하라고 잔소리하고 싶은 마음이 잦아지는 건 반작용으로 나타나는 현상이었다.
그럴 때마다 우리 부부는 서로의 손을 잡고 입을 막아 참기로 했다.
습관은 하루아침에 생기지 않는다.
나쁜 습관은 쉽게 물들지만 좋은 습관을 몸에 익히는 건 오래 걸린다.
디지털 리터러시는 지식으로 끝나지 않고 일상에서 행위와 태도로 나타나야 한다.
온라인 세상에서 올바르게 살아가려면 비판적으로 정보를 바라보고 스스로 행위를 결정하고 그 결과도 책임질 수 있어야 한다.
다행히 그렇게 함께 노력한 시간은 결실을 맺은 것 같다.
아들에게 게임과 PC 사용은 더 이상 컨트롤할 수 없는 도구가 아닌 듯하다.
물론 가끔 일탈을 하기도 하지만 결국 제자리로 돌아오는 힘을 가졌다고 믿는다.
드디어 거실은 PC방이 아닌 원래 목적에 맞는 모습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