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의 쉬운 폭력에 대해서
며칠 전, 별생각 없이 아파트 작은 도서관 서가에 꽂혀 있는 채식주의자를 보았다. 무심코 책장을 넘겼다. 믿을 수 없을 만큼 빠르고 깊게.
난 이미 그 책으로부터 붙잡힌 것을 부인할 수 없었다.
주인공 영혜는 스스로 이야기를 주도하지 않았다. 그녀는 언제나 타인의 관찰 그물에서 어긋나기만을 반복했을 뿐.
첫 번째 이야기에서 영혜의 남편은 아내가 이유 없이 육식을 거부하자 당황한다. 그저 반복되는 악몽 때문에 채식을 택했다는 그녀의 선택은 가족에게 이해받지 못한다. 아버지는 식사 자리에서 억지로 고기를 먹이려 하고, 결국 영혜는 손목을 그어 저항한다.
이 부분에서 떠오른 영화.
에릭 로메르의 <녹색광선>, 1986
영화 <녹색광선>의 주인공 델핀은 친구의 취소로 여름휴가를 혼자 보내게 된다. 내성적인 그녀는 사람들과 어울리기 어려워 외로움에 빠지지만, 억지로 자신을 바꾸려 하지 않는다. 주변 사람들은 너를 위해서라며 충고했다.
특히 고기를 거부하는 장면은 델핀의 성향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단순히 개인적 기호를 말했을 뿐인데, 사람들은 불편해하며 설득하려 들었다. 모두가 그녀를 이상한 존재로 만들어냈지만. 델핀은 그 누구도 비난하진 않았았다. 다만 홀로 속삭이듯, 나는 다르다고 생각했을 뿐이었다.
영혜 역시 자신만의 이유로 고기를 거부했지만, 가족과 사회는 그녀를 이해하지 못하고 오히려 폭력으로 몰아세웠다. 델핀이 고립을 감수하며 자신을 지켰듯, 영혜 역시 인간의 삶을 벗어나 나무가 되고자 했다.
두 사람 모두 타인의 기대와 규범에 맞추기보다 불편한 고독을 선택했다. 하지만 델핀의 고독은 마지막 장면에 녹색광선을 바라보며 눈물 속에서 희망을 찾은 것 같았다. 영혜의 고독은 인간 자체를 넘어서는 절망 속에 해방으로 가는 길이었나 보다.
두 번째에서는 형부의 시선으로. 그는 영혜의 몸에 남아 있는 몽고반점에서 예술적 영감을 참지 못한다. 결국 서로에게 꽃이 되어주는 장면을 찍게 된다. 늘 잠을 이루지 못하던 영혜가 형부의 꽃 그림과 자신의 꽃 그림이 겹쳐졌을 때 비로소 평온하게 잠이 드는 모습.
그 순간 영혜는 어떤 마음이었을지 궁금했다. 꽃을 지우지 않으려고 몸을 씻지 않았던 그녀. 그만큼 그 경험은 특별했고, 세 편의 이야기 중에서 이때의 영혜가 가장 본인이 원하는 것을 찾은 사람처럼 보였다.
영국 미술사학자 케네스 클라크는 『The Nude』에서 알몸과 누드를 구분한다. 알몸(naked)은 불편과 수치심을 동반하는 상태이고, 누드(nude)는 예술적 이상으로 다시 빚어진 몸이다. 영혜가 꽃을 품은 순간은, 늘 폭력과 억압 속에서 알몸으로만 존재하던 그녀의 몸이 잠시나마 예술적 ‘누드’로 전환된 때였을지도 모른다.
자신이 자신에게 타인이 자신에게 새겨놓았던 피의 흔적이 지워지는 순간이었을까 같았다. 그래서 소설 속 처음으로 깊은 잠에 빠질 수 있었던 것 같다. 하지만 그 평온은 오래가지 못했다. 긴박한 아찔함과 깊숙한 두려움이 뒤따르며, 오히려 더 아프게 다가왔다.
세 번째, 에서 시선을 주는 사람은 언니 인혜다.
영혜의 채식 선언은 단순한 식습관의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어린 시절 경험한 강압에 깊은 내면의 저항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녀는 사회와 가족의 억압 속에서 끝내 인간의 욕망과 규범을 거부하고, 폭력과 전혀 관련 없는 나무가 되고 싶어 한다.
책장을 덮은 후 깨달았다.
내가 지금 이 작품을 모국어로 읽을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특별한 일인지. 노벨문학상은 역시 아무나 주는 것이 아니지, 라며 몇 번을 되새기게 되는 듯하다.
영혜는 인간의 삶을 거부하고 나무가 되고자 했다. 폭력 없는 세계를 꿈꾸고 있을까.
<채식주의자>는 단순히 채식을 이야기하지 않는다. 그것은 인간 내면 깊은 곳의 폭력과 죄책감, 그리고 자유를 꿈꾸는 몸부림에 대해서 쓰여있다.
영혜와 델핀, 또 다른 영혜와 델핀, 인혜, 형부, 아빠, 엄마들- 우리는 누구에게 잡아 먹히거나 누군가를 잡아먹고 있는 것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