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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AD] 옥타비아 버틀러의 소설 '쇼리'

흑인 어린 소녀의 얼굴로 하고 있는 53세 기억상실증 뱀파이어 이야기

by 료료

옥타비아 버틀러의 소설 『쇼리』

흑인 어린 소녀의 얼굴로 하고 있는,

53세 기억상실증 뱀파이어 이야기


쇼리는 옥타비아 버틀러가 생애 마지막으로 남긴 소설이다.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뱀파이어 이야기를 그녀만의 시선으로 새롭게 해석했다. ‘쇼리’는 주인공의 이름으로, 겉모습은 어린 소녀지만 사실은 53세의 흑인 여성 뱀파이어다. 그녀는 자신이 누구인지, 그리고 자신을 보살펴주는 사람들에게 어떻게 사랑을 되돌려줄 수 있을지 늘 고민한다. 인간과 뱀파이어의 관계, 인종과 성별을 넘어선 이 작품은, 누구나 알고 있는 단순한 구조 관계 너머에서 공동체의 존재 이유에 대한 깊이가 느껴졌다.


처음 쇼리를 봤을 때, 눈보다 손이 먼저 나섰던 것 같다. 쇼리를 반쯤 읽고 나서 문득 생각했다. 왜 본 적도 없는 뱀파이어 이야기에 이토록 빠져들고 있는 걸까. 읽기 전엔 갖고 있지 않았던 감정들이 생각 속을 떠올렸다. 점점 이 세계에 깊이 발을 들이게 되었다.


쇼리


책 표지에는 흑인 여자아이가 하얀 벽에 머리를 누르며, 몸을 지탱하고 있다. 그림자처럼 드리운 무언가가 쇼리를 떠받치고 있는 느낌이 들었다. 쇼리는 발끝을 들어 머리를 누르고 있었다.


나는 그녀의 검은 피부를 ‘먼저’ 인지하고 있었다. 왜 나는 늘 눈에 보이는 것부터 말하고 마는 걸까. 쇼리는 발을 들고 머리를 계속 누르고 있다.


옥타비아 버틀러는 백인 남성이 주류였던 SF계에서 가장 이질적이고 독자적인 위치를 점한 흑인 여성 작가다. 그녀는 자신의 세계의 틀을 넓힌 특별한 작가였다. 단순히 멋진 미래를 상상하지 않았다. 지금까지 우리가 외면했던 사람들 - 흑인, 여성, 성소수자, 다수가 비정상으로 여기는 권력의 존재들로부터 관습을 깨는 시선으로 전혀 다른 세계를 보여주었다.


버틀러는 단지 소설가가 아니라, 윤리적인 질문을 던지는 사상가로도 평가받았다. 수많은 문학상을 받으며 인정받은 그녀는 ‘공존’이라는 단어의 무게감을 치열하게 가장 진심으로 고민했다.


위키백과 캡쳐 사용


소설 속에서 ‘이나’라는 뱀파이어 종족은 수백 년 동안 순혈주의를 유지하며 철저한 서열 질서를 지켜왔다. 외부의 위협으로부터 공동체를 보호하려는 방식이었지만, 결과적으로는 차별을 고착화시킨 체계였다. 쇼리는 ‘이나’이면서도 유일한 흑인 혼혈 존재다. 그들에게 쇼리는 위협적이고 불편한 존재, 즉 방해물이었다.


순혈을 고집하는 이나는 쇼리와 그녀의 가족을 집요하게 제거하려 한다. 버틀러는 공동체 내부의 서열 구조가 얼마나 폭력적일 수 있는지를 적나라하게 드러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쇼리는 끊임없이 인간과의 공존을 시도한다. 권력의 구조를 무작정 부수기보다는, 경계에 선 실험적인 존재로 그들을 살핀다. 공동체가 나아가야 할 생존 방식, 그리고 더 나은 관계의 형성을 위해 포기하지 않은 쇼리.


‘이나’는 인간과의 공생을 위해 인간을 ‘심비온트(symbiont)’라고 부른다. 심비온트가 된 인간은 이나의 피를 섭취함으로써 건강과 장수라는 혜택을 얻고, 이나는 그 인간의 피를 통해 에너지를 얻는다. 대부분의 이나는 심비온트를 재산이나 생존 수단으로 인식하지만, 쇼리는 다르다. 그녀는 심비온트를 연인, 친구, 가족처럼 여긴다.


『쇼리』의 첫 장면에서 쇼리는 이렇게 말한다. “나는 어둠 속에서 눈을 떴다. 배가 고팠고, 통증이 심했다. 내 세상에는 배고픔과 통증만 있을 뿐, 다른 사람도, 시간도, 감정도 없었다.” 기억을 잃은 상태에서도 쇼리는 인간에게 신뢰와 사랑을 받는다. 그녀 역시 감정을 적극적으로 표현하며 유대감을 쌓아간다. 자신이 우월한 존재로 보이기보다는- 서로 존중하며, 실천하는 방법을 찾아내려 했다.


결국 이 소설은 깊은 숲 속에서 중상을 입고 깨어난 한 소녀의 회복 이야기인 동시에, 사회의 어두운 이면을 마주하는 윤리적 상상력의 결정체다.


옥타비아 버틀러는 “우리는 어떻게 함께 살아갈 것인가”라는 질문을 집요하게 탐구하며, 『쇼리』를 공존에 대한 진지하고도 간절한 이야기로 이끌어간다.



쇼리를 찾고 나서 메모한 료료, 버틀러에 대한 나의 긍정적 표현메모


25.4.3. 일기메모


쇼리를 읽고 나서 집에 와 주르륵 일기가 적혔다. 매일 적지 않는데 그날은 자연스레 주르르르 적혔던 기억이 있다. 쇼리를 참 맘에 들게 읽고 나서 언젠가 또바기에 적어야겠다 생각했는 게 그것이 7월의 마지막이 되어갈 때쯤 일지는 몰랐다.


우리 모두의 다양한 객체들에게 공존과 자유를 외치며.

안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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