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프카, 카프카, 배수아
어떤 책은 펼치기 전부터 기억 하나를 떠올리게 한다.
다다르다 서점에서 검은 표지의 책을 집어 들었을 때도 그랬다. 그 책은 상품처럼 보이지 않았다. 이미 그 자리에 그 존재로 덩그러니 놓여있었다. 그 종이의 층을 보니 순간 한 사람이 떠올랐다.
고등학교를 같이 보내고 대학교 때에도 자주 만났던 친구가 있었다. 그와 나는 늘 책과 영화 이야기를 나누었다. 친구는 내가 책이 좋다고 했을 때에는 '배수아의 소설'에 대해 말해 주었고, 철학이 좋다고 말했을 때에는 <소피의 세계>를 나에게 건네며 네가 좋아할 것 같다고 이야기했었다.
일본 문학에 관심을 보였을 때는 무라카미 하루키의 소설 <세계의 끝과 하드보일드 원더랜드>를 알려주었다. 많은 것들을 나에게 가르쳐주었다. 제목들은 모두 흥미로웠지만 선뜻 손이 가지는 않았다. 나는 각자의 고유한 취향을 존중하면서도 스스로의 선택해야만 좋아하는 습성이 있었다. 누군가 추천한 것에 대해서는 오히려 잠시 거리를 두는 쓸모 없지만 쓸모 있는 나의 방향성이라고 할까?
영화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친구가 말한 ‘존 말코비치 되기’ 역시 크게 마음이 움직이지 않았다.
하지만 다시 친구는 나에게 또 다른 영화를 소개했다.
“처음 만나는 자유라는 영화가 있어.”
친구가 그렇게 말했을 때는 조금 달랐다. 제목부터 마음에 들었다.
처음 만나는 자유라니.
그래서인지 지금도 배수아라는 이름을 떠올리면 그 친구가 먼저 떠오른다. 그러나 그 작가의 책에는 가까이 간 적이 없었다. 그렇게 거의 이십 년이 흘렀다.
그러다 작년, 대전의 다다르다 서점에서 그 책을 마주하게 되었다. 서점 문을 열고 한 걸음이 그곳에 닿는 순간, 어딘가 달라진 공기에 나는 조금 더 긴장하게 되었다. 책장 사이의 정적 속으로 햇볕이 비추며 따뜻한 책 먼지 냄새가 나는 듯했다.
경직된 몸짓으로 주위를 돌아보다가 1층 나무 테이블 위에 몇 권의 책이 놓여 있는 것을 발견했다. 그중 검은 표지의 책 한 권이 눈에 들어왔다. 마치 사람의 손을 기다리지 않아도 이미 그 자리에 완성된 하나의 존재처럼 놓여 있었다.
표지를 넘기자 또 하나의 표지가 나타났다. 격자무늬가 쳐진 푸른 색지, 크래프트지, 그리고 트레이싱지. 여러 장의 종이가 나뉘어 붙어있는 구조였다. 그것이 단순한 디자인인지, 아니면 어떤 세계로 들어가기 위해 마련된 장치인지 나는 알 수 없었다.
책을 들고 페이지를 차르르 넘기던 순간 쪽지 하나가 떨어졌다. <디자이너의 말 - 이기준>이라는 긴 쪽지였다.
마지막 문단에 이렇게 적혀 있다.
다만 이 설명은 디자인을 읽는 한 가지 예시일 뿐이어서 독자마다 자기 방식으로 접근했으면 좋겠다. 디자이너도 모르는 독법이 숨어 있다.
처음 그 쪽지를 봤을 때는 “꽤 재미있는 접근이네.”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돌아와서는 한참 책을 집에 그대로 두었다. 몇 달이 지나 다시 책을 펼쳤을 때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책이라는 물체를 바라보며 내 머릿속에서 상상해 오던 생각들이, 디자이너 이기준과 배수아 작가에 의해 실제의 형태로 보이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디자이너가 책을 스스로 존재하게 만드는 방식도, 배수아 작가가 그 안에 여러 겹의 목소리를 담아내는 방식에 쉽지 않은 그들의 고뇌도 많지 않았을까?
배수아 작가는 독일 문학을 번역한다. 그래서인지 프라하에서 태어난 독일어 작가 카프카 이야기가 꽤 나왔다. 책 내용에서도 제목에서도 카프카적 의미가 통하는 이야기들이 담겨 있다. 카프카의 소설 <변신>에서는 어느 날 아침 한 남자가 잠에서 깨어났을 때 자신이 거대한 벌레로 변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그러나 이야기의 핵심은 벌레가 되는 사건 자체가 아니다. 그 이후에 시작되는 예민한 감각이다. 자신의 몸이 낯설어지고 방이라는 공간이 갑자기 다른 형태로 느껴지며 가족과 사회 속에서 이해되지 않는 존재가 되는 경험이다.
배수아의 소설에서 ‘험윤’은 실제로 벌레로 변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에게서 나타나는 감각은 변신의 이야기와 닮아 있다. 그는 거울 앞에서 면도를 하다가 자신이 벌레로 변할 수도 있다는 상상을 한다. 그것은 감각이 예민해지며 하나하나를 느끼게 되는 순간이다. 자기 얼굴을 바라보는 순간 자신이 지금의 자신이 아닌 다른 존재가 될 수도 있다고 생각하게 된다.
이 이야기에는 ‘밀레나’라는 이름도 등장한다. 밀레나는 실제 인물이다. 체코 출신 기자이자 번역가였고 카프카와 편지를 주고받았던 사람이다. 두 사람의 편지는 나중에 한 권의 책으로도 남았다.
소설에서도 편지가 등장한다. 험윤의 어시스턴트는 그 편지를 펼쳐 보지만 외국어라 읽을 수 없다고 말한다. 자신은 밀레나가 누군지도 모른다고 말한다. 편지는 존재하지만 의미는 전달되지 않는다. 누군가에게는 중요한 기억이지만 다른 사람에게는 이해할 수 없는 외국어일 뿐이다.
어시스턴트는 험윤에게 함께 일하자고 말한다. 그것은 기나긴 여행이 될 것이고 황홀할 것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동시에 말한다. 나는 밀레나가 아니다. 설사 밀레나였다 해도 나는 그것을 모른다. 아무도 그것을 모른다.
누군가의 기억 속 인물이 되는 것이 가능한가. 누군가의 기억 속 밀레나는 실제 인물일 수도 있고 기억 속 이미지일 수도 있으며 문학적 환영일 수도 있다.
그래서 이 이야기는 계속 같은 질문을 반복한다. 현실과 기억은 어디에서 나뉘는가. 지금 이 순간과 오래된 기억의 시간은 어떻게 겹쳐 있는가. 우리가 만나는 사람은 실제 사람인가, 아니면 기억 속에서 만들어진 이미지인가.
다다르다 서점에서 느꼈던 공기의 차이도 어쩌면 그런 감각과 닮아 있었다. 어떤 장소는 단순한 공간이 아니라 다른 시간의 층으로 들어가는 입구처럼 느껴진다.
서점의 조용한 공기 속에서 책을 펼치면 그 안에는 또 다른 장면이 열린다. 그곳에서 사람들은 긴 낭하를 걷고 서로 다른 온도의 커피를 마시며 이해할 수 없는 편지를 읽고 존재하는지 확신할 수 없는 사람을 기다린다.
우리는 그 안으로 잠깐 들어가 버린다. 서점의 문을 열고 몇 걸음 들어가는 순간처럼.
그 공기 속에서 현실과 기억과 문학의 경계는 아주 미묘하게 흐려진다.
험윤 천천히 브리오슈를 뜯어 먹고 두 잔의 각기 다른 온도의 에스프레소를 마시며 유리창 밖으로 지나가는 행인들을 구경한다. p.29
험윤은 문득 누군가 자신을 지켜보고 있다는 느낌이 들어, 고개를 들고 주변을 살핀다. 까페는 절반쯤 가득 찼고, 절반쯤 비어있다. p.32
거울 속의 그는 등을 보이며 다시 걷는다. 그는 엘레베이터와 마주하는 낭하를 걸어간다. 그는 금이 간 거울 속에서 멀어진다. 그는 점점 소실된다. 그는 낭하의 끝까지 걸어간다. 그리고 가장 마지막 문 앞에 선다. 그는 머뭇거리다가 벨을 누른다. 거울 속에서 그의 모습은 조그맣게 보인다. 문이 열리고, 누군가가 그를 집안으로 맞아들이는 광경을, 금이 간 흐릿한 밤의 거울이 멀리서 지켜본다. p51
현실인지 꿈인지, 현대인지 지나온 시대인지 알 수 없는 벌어진 틈 사이에서 흐릿한 끝을 바라보게 된다
_료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