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탁 위에 남은 말
나는 이 책을 삼키다 몇 번이나 모래를 씹는 기분이 들었다.
『걸리버 여행기』는 그저 오래된 환상 동화인 줄 알았다. 세종시 공공도서관 독서동아리에서 책을 지원받아 읽기 전까지만 해도 그랬다. 그러나 책장을 넘기는 내내, 그리고 마지막 장을 덮는 순간까지도 이 글을 쓴 풍자문학가 조너선 스위프트에게 느끼는 감정을 한마디로 설명하기 어려웠다. 물론 300쪽이 넘는 장편소설이기도 했다. 하지만 단지 양 때문은 아니었다. 이 이야기는 한 번에 정리하기 힘들 만큼 깊고 복잡했다.
책 속 네 나라는 스위프트가 살았던 시대의 정치와 문명, 학문과 인간성에 대한 고발에 가깝다. 소인국에서는 사소한 권력 다툼을 풍자했고, 거인국에서는 문명의 탈을 쓴 인간의 잔혹함을 드러냈다. 날아다니는 섬은 현실을 외면한 공허한 지식인을 떠올리게 하고, 후이눔과 야후의 대비는 인간 본성에 대한 깊은 절망으로 읽힌다. 그는 인간과 사회에 대한 희망을 꿈꾸기도 했겠지만, 동시에 그 가능성을 끊임없이 무너뜨리는 탐욕과 위선에 치를 떨었던 것 같다.
스위프트는 도대체 어떤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보았기에 이렇게까지 비틀어 보여줄 수 있었을까. 그의 문장은 환상적이지만, 날카로운 칼처럼 인간의 본성을 향해 주저 없이 휘둘렀다. 그 잔혹함은 상상이라기보다 관찰에 가깝다.
1667년, 그는 대화재로 폐허가 된 런던에서 태어났다. 도시는 새롭게 설계될 기회를 맞았지만, 토지 소유권 분쟁과 정치적 반발로 무산되던 시기였다. 화려한 귀족 사회의 겉모습 뒤에서 쓰레기와 악취, 전염병으로 뒤덮인 도시의 이면을 보며 자랐을 것이다. 그는 시대를 고발했지만 우화라는 장르를 빌려 직접적인 비판을 피했다. 책은 익명으로 출간되었고, 표현의 자유가 조금씩 허용되던 시대 분위기 또한 그를 보호했다. 게다가 그는 아일랜드 더블린 성패트릭 대성당의 수석 사제이자 영국 성공회 성직자였다.
내가 영국 역사에서 긍정적인 면을 발견한 이유는 바로 그런 글이 세상에 나올 수 있었다는 점이다. 당시 조선이었다면 상상하기 어려웠을 일이다. 스위프트는 그 조건 안에서 글을 썼고, 살아남았다. 절망 속에서도 그의 문장은 시대를 통과해 남았다. 나 역시 글을 쓰는 사람으로서, 그 자유와 지위가 부러웠다.
지금은 노골적인 검열 없이도 수많은 글이 쏟아지는 시대다. 그럼에도 나는 스위프트처럼 글을 쓰기 위한 용기를 훔쳐오고 싶어졌다. 그가 증명한 것은 말이 사람을 살릴 수도, 다치게 할 수도 있다는 사실이었다. 그것이 내가 여전히 글을 쓰는 이유이기도 하다.
나는 그 사실을 거대한 사회가 아니라, 우리 집 식탁에서 매일 맛본다. 어떤 날은 종일 비가 쏟아져 하늘이 먹구름으로 뒤덮인다. 그러다 학교를 마치고 돌아온 아이와 늦은 오후를 마주할 때, 커튼 사이로 햇살이 스며든다. 대화도 그렇다. 때로는 마음을 데우고, 때로는 지나쳐 눈이 부시다.
가끔 아이는 좁쌀만 한 감정들을 하나씩 꺼내 던진다. 질퍽한 모래처럼 쌓여가던 마음이 한꺼번에 쏟아진다. 마치 항해하던 걸리버를 집어삼키던 파도처럼, 감정은 순식간에 나를 숨 막히게 둘러싼다. 숨 막히게 입 안 가득 삼킨 질퍽한 모래를 천천히 굴리다 보면, 그 안에서 포도알처럼 달콤한 맛이 살아남기도 한다.
엉망이 된 아이의 표정을 보며 “오늘 억울한 일이 있었구나.” “기대만큼 잘 풀리지 않았구나.” “실은 나한테 위로받고 싶었던 거구나.” 나는 그 말을 다시 아이에게 건네며 되돌려준다. 너도 한번 맛보라고, 이 모래 안에 숨은 달콤함을 함께 확인해 보자고.
사실 그 안에는 내가 이미 삼켜본 모래의 깔끌함도 섞여 있다. 스위프트가 우화를 빌려 인간의 얼굴을 비틀어 보여주었듯, 나 역시 말속에 달콤함과 불편함을 함께 건넨다. 무언가가 숨겨져 있었다는 것을, 그걸 함께 확인해 보자고 말한다. 네가 뱉은 질퍽한 감정이 삶 속에서 마주하게 될 감정이라는 것도, 나는 엄마로서 그 속에서 달콤함을 찾아 다시 건네줄 수 있다는 것도.
소인국에서는 말장난으로 포장된 권력 싸움이 벌어지고, 거인국에서는 고상한 말 뒤에 폭력이 숨어 있다. 라퓨타에서는 현실과 단절된 지식의 언어만이 공중에 남아 떠다니고, 후이눔과 야후의 세계에서는 이성이라는 말로 인간을 혐오하고 하는 지점에까지 이른다. 『걸리버 여행기』에서 스위프트는 언어가 세계를 만드는 동시에, 그 언어가 어떻게 권력으로 변해 인간을 지배하는 지를 끝까지 밀어붙인다.
나는 아이가 사회의 위선을 마주하더라도, 자신의 삶을 잃지 않기를 바란다.
오늘도 아이와 대화를 나눈다.
질퍽한 모래 맛, 식탁 위에 남은 말 하나쯤이 삶을 버티게 해 줄지도 모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