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iss, kiss, kiss
공기의 맛
줄무늬의 고집
줄무늬 셔츠를 좋아하는 남자가 있다. ‘매일 줄무늬 셔츠만 입을 것인가? 동물원에 가면 얼룩말만 쫓아다닐 것인가?’ 나는 중학교 때 36가지 아이스크림을 즐겨 먹었다. 그중에 초록초록 맑은 빛을 내는 민트 초코칩 아이스크림을 가장 좋아했다. 20년이 훌쩍 지난 지금 아직도 나는 민트 초코칩을 먹고 있는가? 물론 매일 같은 옷을 입고, 매일 같은 음식을 먹는 사람이 존재한다고 어느 동화책에서 읽은 기억이 있다.
가끔 상상한다. 나는 컵라면을 좋아한다. 매일 컵라면을 먹는다면 너무 좋을 것 같다. 하지만 얼마 전 한 달 정도 컵라면을 하루에 하나씩 먹은 적이 있다. 물론 너무 맛있었다. 얼마나 맛있었는지 먹으면서 몇 번이나 감격했는지 모른다. 먹는 동안에는 내가 얼마나 행복한 사람인지 자랑스러울 정도로 미소를 머금으며 그 시간을 즐겼다. 건강에 좋지 않다는 컵라면을 이렇게 매일 먹어도 될까? 컵라면에 지배당했다는 생각에 좌절감을 느끼기도 했다.
줄무늬 셔츠를 좋아하는 남자가 있다. ‘체크무늬는 어떨까?’ 사실 체크무늬도 제법 근사할 때가 있다. 어떤 날은 하얀 바탕에 아무 무늬가 없이 에드워드 호퍼 그림에 담긴 사람들의 얼굴처럼 분장된 얼굴, 창백한 얼굴같이 그대로 멈춰있는 시간의 공기가 있다. 사람에게 고집이 없다면 그 사람은 과연 사람으로 살아가는 걸까? 하지만 혼자만의 고집은 있을 수가 없다. 고집은 누군가에게 부려야 하는 것이다. 누구에게 부릴 것인가. 정말 새하얀 창백한 얼굴의 셔츠에게 부릴 것인가. 집요한 공기의 관념은 창의적이어야 한다. 집요하게 일관적인 그들의 주장은 설득력에 점점 무너지기 때문이다.
키스의 고집
줄무늬 남자는 나를 움켜잡는다. 나른함까지 휘감아 삼켜낸다. 무거운 영혼이 닿을 때마다 온몸이 떨릴 만큼 확신에 찬다. 엉켜 들어오는 손길에 격렬해진다. 어느 한 곳도 소외되지 않게 낱낱이 해체한다. 당혹감에 고개를 돌리지만 곧, 공기를 흡입한다. 사방으로 회전하는 힘을 구속한다. 뒤척이는 바람에 흩어지는 빛을 찾아, 통제되지 않는 기쁨은 체내로 가는 신호를 밝히고 말았다. 나는 줄무늬 남자와 예술을 한다. 이렇게 꼭 집어 쉬운 내가 이 순간만은 부서질 것 같은 기다림에 타들어 간다. 맹렬한 기세로 공기의 맛을 본다.
공기의 식감은 어떠한가. 키스는 고집을 부린다. 당연히 내가 나서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바삭할 것인지 부드러울 것인지 사르르 녹을 것인지 그것도 아니라면 쫀득쫀득 늘어나는 공기일 것인가 말이다. 키스가 고집을 부릴 때 줄무늬 남자는 가만히 서 있다. 그저 입에 착 붙는 고소한 소스와 입 안이 얼얼하게 매운 음식을 먹는 것처럼. 공기의 풍미만 한층 살려주면 그뿐이었다. 입 안을 가득 채우는 진한 맛은 키스의 고집 맛이었다.
Kiss, Kiss, Kiss
나는 줄무늬 남자를 사랑한다. 하지만 상처를 주고 싶을 때도 키스하고 싶고, 사랑을 하고 싶을 때도 키스하고 싶다. 생각해 보니 키스도 매일 하고 싶은 걸까. 나의 행위는 특정 순간에 잊을 수 없는 기억으로 남아야만 하는 상황이 아니다. 금지된 것 없이 감정적으로 갈등 없이 불안감과 죄책감도 없이 오로지 쾌락과 행복을 위해 존재할 수 있다면 그것도 고집이지 않은 가?
컵라면을 먹고 키스를 한다면? 어떤 컵라면을 먹는가에 따라 생각이 바뀔 것 같다. 하지만 난 쾌적한 상태에서 공기의 맛을 느끼고 싶다. 컵라면의 공기를 사랑하는 것은 아니다. 컵라면을 좋아하지만 컵라면 공기를 사랑하는 것이 아니다. 좋아한다고 다 사랑하는 것이 아니다.
나는 줄무늬 남자를 사랑한다. 사랑한다. 좋아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하는 것일까? 사랑하지만 좋아하지 않는 걸까? 나는 컵라면을 좋아하고, 사랑까지는 모르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 달 동안 매일 컵라면은 먹을 수 있다. 하지만 나는 줄무늬 남자와 한 달 동안 매일 키스를 할 수 있을까? 나는 줄무늬 남자를 좋아할 때도 있다. 비록 그렇더라도 매일 키스는 어려울지도 모른다. 여전히 나는 컵라면은 매일 먹을 수 있다. 뭐. 그렇다는 거다. 그냥. 모순이라는 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