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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료료 Nov 22. 2024

모순의 힘

약속이 없는 날과 약속이 있는 날

모순의 힘


약속이 없는 날

안개는 사실적이었다. 시간은 식욕적이었다. 나는 스스로 짙은 안개 속에 떠밀려 현실로 빨려 들어갔다. 흐릿한 그림자들이 긴 시간 속에 막무가내로 나를 잡아먹었다. 얼른 안개를 지우고, 시간을 지운다. 내가 아팠던 기억을 지우고, 또 지우는 아픔을 다시 겪는다. ‘아무것도 아닌 날들이 있었을까? 어떠한 것에 의미를 두고 있는 걸까. 상처였을까?’ 오히려 상처라는 단어 뒤에 숨고 싶었을까. 나는 온갖 모순의 형상을 만들고서 살아간다. 아물지 않은 상처를 돌이켜서 아픈 것일까? 오래된 상처를 담아놓은 사진을 보고 지금이라고 믿고 있지는 않았을까? 모순은 늘 의문형이다.      


약속이 없는 날은 자유다. 자유 속에 차가운 공허함은 상쾌하다. 섬에서 몇 시간을 외로운 알맞음으로 지낸다. 그 시간을 보내면 하교하는 아이들이 집으로 온다. 나는 섬에서 아이들이 돌아오고 있는 그 집으로 건너간다. 기쁜 마음으로 맞이하지만 어떤 날은 조금 더 섬에 남아 있고 싶을 때도 있다. 그렇다가도 아이가 올 시간에 도착하지 않으면 걱정이 밀려와 불안해하고 만다.     

 

약속이 있는 날

약속이 있다. 기다림이 가득한 날이다. 어떤 날에는 정말 지키고 싶지 않을 때도 있다. 직접 나서서 정했을 때도 말이다. ‘감정이라는 것은 사람 같은 것일까? 감정이 동물 같았더라면 이렇게 변덕스럽지 않았을 것 같다. 어떤 동물이었으면 좋았을까?’ 내 감정은 코끼리정도로 하고 싶다. 사막이나 초원에서 나의 감정을 찾을 수 있으면 얼마나 재밌을까. 이번에는 코끼리 뒤에 숨고 싶었을까? 작은 동물로 하고 싶지 않았다. 안정적인 장소가 필요했다.

      

약속이 있었다. 하지만 나는 그 약속이 영원하다고 생각하지 못한다. 늘 가정한다. 어떠한 경우에는 내가 생각하지 못하는 일이 갑작스레 벌어질 거라는 것을. 어떠한 모순된 상황이라도 그것은 자연스럽게 다시 생길 수 있는 그런 일이라고. 약속이 아프게 자리 남을 때가 있다. 약속은 지키라고 있는 것이지만 어긋나게 만나지 못하는 약속도 있다. 어렸을 때 언니와 약속을 많이 했었다.      


“오늘은 일찍 들어와.”라고 언니에게 늘 당부했다. 아주 어렸을 때부터였다. “응. 당연하지.”, “진짜지? 약속해야 해? 엄마랑 아빠가 많이 걱정한다고!”, “알겠어. 정말 약속할게.”, “응. 그리고 오늘은 꼭 나랑 같이 자야 해!” 나는 어렸을 때 혼자 자면 큰일 날 것처럼 정말로 벌벌 떨었다. 얼마나 무서웠는지 차라리 죽고 싶을 정도였다. 아니 사실 혼자 자면 죽을 것 같았다. ‘이대로 나 죽으면 어떡하지? 저승사자라도 나타나서 날 데리고 가면 어떡하지?’ 상상과 두려움에 놓여 있었다. 지독하게 겁이 많은 아이였다. 항상 언니들이 항상 날 놀리거나 협박했었다. 그게 너무 괴롭게 미웠지만 난 어쩔 수 없이 그들을 따라다닐 수밖에 없었다. 어두운 밤에 혼자 있는 건 정말 미칠 정도로 싫었기 때문이었다.     


언니는 한 번씩 나를 놀렸다. 타격감이 아주 좋았던 나였다. 생각해 보면 말이다. 언니는 가끔 주방에서 식칼을 가져와 한 손으로 돌리기도 했었다. 꼭 내가 있는 곳으로 와서 위협하는 느낌이었다. 저러다 놓치기라도 하면 어떡할지 불안에 떨 때가 많았다. 나는 고소공포증이 있었다. 우리 집은 3층이었다. 고층은 아니더라도 내가 충분히 무서워할 수 있는 높이였다. 언니는 심심하면 나를 놀렸던 것 같다. 아파트 창살에 언니 다리를 넣고 흔들며, 창틀에 앉아서 나를 보며 웃었다. “언니 제발 내려와.” 전혀 들리지 않는 사람처럼 바깥 구경을 한참 했다. 어떤 날은 반대로 나를 발코니에 넣고, 문을 잠그고 열어주지 않았다. 문을 열어 달라 애원하며 소리치는 동시에 비치는 유리창으로 언니의 웃고 있는 입꼬리를 보았다.   

   

모순의 힘

언니는 언니였다. 그냥 좋았던 것 같다. 너무 싫었다가 미웠다가 무서웠다가 수없이 반복했었다. 하지만 늘 같이 있고 싶은 언니였다. 책 제목을 언니라고 정하고 열 권을 적을 수 있는 정도로 나는 그녀를 바라보고 있다는 걸 이제 서야 느낀다. 다정할 때는 한 없이 다정했던 그녀. ‘그런데 왜 그랬을까? 왜 항상 외로워했을까.’ 그녀는 우리 집의 꽃 같았다. 언니처럼 피어나는 꽃을 모순이라고 불러도 좋겠다. ‘아름다운 모순일까? 향기로운 모순일까? 어느 날에 시들어 꺾이고 마는 모순인 걸까?’ 한참을 맡아봤다. 그렇게 늘 기다렸었다.

      

심장처럼 붉은 꽃잎을 흘려보낸다. 꽃잎을 다 흘려보내는 순간 박동이 멈추면 곧 우리의 관계는 살아있지 못하고 끝이 난다. 심장이 떨린다. 심장이 찢어진다. 낮에는 설렘이, 저녁에는 슬픔이 모순적인 기다림이다. 심장이 계속 뛰는 동안 누군가를 사랑하고, 미워하는 마음을 가지며 동시에 심장의 감각은 충돌한다. 모순의 힘에서 나는 심판하지 않았다. 마음먹는 대로 생각하는 대로 누군가를 판단할 수도 붙잡을 수도 없기 때문이었다.


안토니 사우라, el patito feo(미운 오리 새끼), 65X50, 석판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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