걷기에 대한 이러저러한 생각들
서서 걷는 걸음으로 인하여 인간은 '앞으로 나아가는 존재'가 되었다. 인간은 앞으로 내딛는 걸음을 걸으면서 지구 구석구석까지 흔적을 냈고, 그 흔적의 축적으로 문명을 일궈냈다. ‘걸음’을 나타내는 단어가 배회, 방황, 산책, 트래킹, 도보여행, 순례, 대장정, 발품 팔기 등 수없이 많고, ‘걸음’ 모양새를 나타내는 말도 어슬렁어슬렁, 뚜벅뚜벅, 타박타박, 흐느적흐느적, 비실비실, 겅중겅중, 종종거림, 뒤뚱거림 등 여럿 검색되는 것으로 보아 ‘걸음’은 먹고 자고 사랑하는 일만큼이나 인간에게 중요한 활동임에 분명하다.
걷기 하면 느림, 여행, 고독, 명상, 치유, 사유, 흔적, 길 등의 단어가 연상된다. 어떤 사람은 아파서 걷고, 어떤 사람은 기뻐서 걷고, 어떤 사람은 슬퍼서 걷는다. 생각을 멈추려 걷는 사람이 있고, 생각에 빠지려 걷는 사람도 있고, 또 그냥 걷는 사람도 있다. 혼자 걷기를 좋아하는 사람도 있고, 단둘이 걷기를 좋아하는 사람도 있고, 여럿이 어울려 걷기를 좋아하는 사람도 있다. 지금 여기서 이야기할 걸음은 이 중에서 '느림의 의미를 구현하는 걷기'일 터이지만 치유적 걷기, 유희적 걷기, 탐험적 걷기 등 걷기의 효용 측면에 대한 논의도 빼놓을 수 없다.
걷기의 치유적 효능을 발견한 것은 꽤 오래되었다. 의술의 아버지 히포크라테스는 “모든 질병은 장에서 시작된다. 음식이 곧 약이고 약은 곧 음식이다. 걷기는 사람에게 최고의 약이다. 우리 속의 자연 치유력이 진정한 질병의 치유제다.”라며 걷기가 자연 치유력을 높인다고 했다. 걷기는 온몸에 혈액 순환을 도와 몸을 따뜻하게 한다. 몸 구석구석 모세혈관에 피를 공급하여 신진대사를 촉진하여 에너지를 공급하고 노폐물을 정화해 준다. 폐활량을 높여주어 산소공급을 늘려주고, 적정한 근육량을 유지하게 하여 지구력을 길러준다. 이것만으로도 걷기가 치유에 효용이 있다는 것은 확실한데, 걷기에는 이런 효용을 넘어서는 의미가 있다.
걸음은 앞으로 나아가는 전진(진보, 성장)을 상징하고 그것을 실현하는 삶의 근원적 몸짓으로서의 의미가 있다. 걸음의 99%는 앞으로 걷는 활동이다. 혹 몸을 되돌려 반대 방향으로 갈지라도, 뒷걸음쳐 거꾸로 가는 경우는 거의 없다. 다른 동물도 그렇긴 하지만 인간은 앞으로 가는 몸의 움직임을 통하여 전진과 진보와 성장을 추구한다. 목표를 지향하고, 목표 넘어 무언가를 탐구하고 발견하고 또 넘어선다. 이렇게 하여 문명을 만들어가고 역사를 일궈낸다. 인간은 걸으면서 집단무의식으로 진보와 성장을 이념으로 가지게 되었고, 또 지금 우리는 걸으면서 진보를 꿈꾸고 성장을 실현한다.
걷기는 감각의 열림이고, 감수성의 깨어남이다. 브르통의 말을 빌리자면 “걷기는 무엇보다도 감각의 예술이다.” 닫힌 인공적 공간에서 감각하는 것과는 다른 열린 공간에서 만나는 자연의 온갖 신비로움에 나의 감각이 잠에서 깨어난다. 브르통이 “세상은 아낌없이 선물을 주고, 여행자 또한 탐하지 않고 받아들인다.”라고 말한 것은 바로 이런 뜻이다. 걷기를 통해 인간은 세상과 소통하는 기초적인 감각[氣]이 열리고, 그 소통으로 인해 기막힌 상황을 돌파할 힘을 얻는다.
걷기는 모든 활동, 심지어 공부와 같은 정신활동의 기본 운동이다. 무술 하는 사람과 무용하는 사람에게서 걷기가 기본 몸짓이듯이1) 공부하는 사람이나 사업하는 사람에게도 걷기는 기본 운동이다. 바로 서서 걷지 아니하고서 건강한 공부, 건강한 사업을 펼칠 수 없다. 이유는 간단하다. 몸과 마음 생각은 원래 구분되지 않는 한 덩어리인데 굳이 구분하자면 몸이 기초이고, 몸 중에서 발이 기초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걷지 않고서도 생각 깊은 사람은 가끔 있지만, 잘 걸으면서 생각 얕은 사람이 거의 없는 것이다. 소로가 <걷기의 유혹>에서 걷지 않는 모든 사람을 싸잡아 "오래전에 다들 자살하지 않았다는 사실에 점수를 주고 싶다."며 독설을 날린 까닭이 이 뜻 아닌가 싶다.
생각하는 사람, 특히 공부하는 사람에게 걷기는 사유의 조건이자 장이며 존재 자체이다. 사유 조건이라 한 것은 걸으면서 잡다한 생각을 정리하며 날려버릴 수 있어 사유할 준비가 되었다는 뜻이고, 사유의 장이라 한 것은 건강한 생각이 샘솟는 공간이라는 뜻이며, 존재 자체라는 것은 걸으면서 존재 체험을 할 수 있다는 뜻이다. 루소는 “나만의 걷기 여행에서만큼 많이 생각하고 많이 존재한 적은 결코 없었다. 감히 말하자면, 이번 여행에서만큼 나 자신이었던 적은 없었다.”2)고 했다. 걸음을 통하여 ‘존재’가 무엇인지 온몸으로 느낄 수 있으니, 그것은 ‘나’의 존재감이며 ‘참 나’를 찾음이고 곧 실존의 회복이다.
걷기는 최고의 정신적 경지를 상징하기도 한다. 동양의 장자는 이를 소요유라고 표현하였다. 너무 크고 못생겨서 아무 쓸모없는 나무라고 불평하는 사람에게 “왜 넓은 들판에 심어놓고 그 나무 아래 그늘에서 왔다 갔다 어슬렁대면 될 걸”3) 하면서 그렇게 걸으면서 온전히 자유로운 정신적 경지를 '소요유'라 표현했다. 아리스토텔레스도 학도들과 리케움(Lyceum) 숲을 산책하면서 강의하고 토론하였는데, 나중 사람들은 그들을 '소요'학파(Peripatetic school)라 불렀다. 보통 사람들은 소요하는 사람을 게으르든지 할 일 없는 사람으로 여길지 모르지만, 철학자들은 거니는 사람을 자유롭거나 자유를 갈망하거나 최소한 자유를 지향하는 사람이라고 말하고 있다.
여기서 걷기로 유명한 칸트와 니체의 이야기를 하지 않을 수가 없다. 칸트는 쾨니히스베르크 산책로를 매일 오후 4시부터 수년간 걸었다. 동네 사람들이 그가 나타나는 것을 보고 시계를 맞추었다고 하니 그 규칙성과 지속력에 감탄이 나올 정도다. 그가 그렇게 걸었던 것은 건강의 이유가 있었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그보다는 "내 위의 별이 빛나는 하늘과 내 안의 도덕법칙"을 발견하기까지의 지난한 사유의 추동력을 얻기 위한 철학적 전략이 아니었을까 추측해 본다. 니체는 칸트와는 다른 측면의 걷기 예찬론자이다. “야외에서 자유롭게 움직이며 나오지 않은 생각은 절대 믿지 마라. … 한 번 앉았다 하면 일어날 줄 모르는 끈기야말로 신성한 정신에 위배되는 진정한 죄악이다.”4) 몸을 움직이며 하는 생각이야말로 참된 생각이라는 것이다. 니체의 이런 생각은 '몸에서 나온 사유가 아니면 허무한 형이상학일 뿐이라고'라고 강변하는 것으로 보인다.
걷기는 ‘느림’의 미학을 구현하는 예술 활동이다. 브르통은 이를 “걷기는 시간을 버는 일이 아니라 오히려 우아하게 잃는 일이다. … 걷기는 시간을 충분히 차지하되 느릿느릿 차지하는 일이다.”5)고 표현한다. 느리게 사는 나에게 보석비처럼 뿌려 내리는 시간을 충분히 내 삶으로 살려내는 우아한 방법이라는 것이다. 또 걷기는 ‘자유’를 누리는 주체 활동이다. 걷는 동안 누구나 자기 시간의 유일한 주인이 된다. 어디로 갈 것인지 어디쯤에서 걸음을 멈출 것인지 무슨 생각을 할 것인지 오로지 나로부터 결정된다. 그렇기에 걷기는 주체적 삶을 방해하는 것들에 대한 일종의 ‘저항’적 활동일 수도 있다.
제대로 된 공부를 오랫동안 하고자 하는 자는 귀 기울여 들으시라. 공부는 엉덩이로 한다는 말만 들어온 자들도 이 글에 주목하시라. 공자의 표현법을 빌리자면, “앉아서 공부만 하고 걸으며 사유하지 않으면 위험하고, 걸으며 사유만 하고 앉아 공부하지 않으면 허망하다.”
1) 걷기가 완성된 때 바닥을 딛지도 않고서 걷는 것처럼 느끼게 된다.
2) 루소, <고백> [프레데리그 그로, 이재형 역, <<걷기, 두 발로 사유하는 철학>>에서 재인용]
3) 장자, <소요유(逍遙遊)>, 彷徨乎无爲其側, 逍遙乎寢臥其下.
4) 니체, <에케 호모> [프레데리그 그로, 이재형 역, <<걷기, 두 발로 사유하는 철학>>에서 재인용]
5) 브르통, <느리게 걷는 즐거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