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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환타타타 Aug 22. 2024

두 무위자연 여행법

아내의 손바닥 안에서


‘이번 여행은 물 흘러가는 대로 다니다 우연히 만나는 것에서 의미와 재미를 찾자’ 아내와 잠정적으로 합의하고 체코 여행을 떠났다. 그동안 아내의 세세한 계획을 따라가는 여행에 별로 재미를 느끼지 못했기 때문에 함께 여행을 떠나는 조건으로 이 슬로건을 제안했다..” 다행히 아내는 이 조건을 받아들였고, 이번 여행에서 아내가 할 일의 범위를 비행기표와 호텔을 예약하는 것으로 제한하였다. 그리고 여행을 잘 다녀왔고 나는 여행 동안 기행문을 여러 편 썼다. 그 몇 편을 간단히 소개한다.


#1. 여행 중에 눈물을 흘리기는 처음이다. 베를린 여행 중 우연히 보게 된 조각상 때문이었다. 브란덴부르크문에서 운터덴린덴 대로를 따라 걷다가 오래된 건축물 하나를 발견했다. … 안은 통으로 텅 비어 있고, 한가운데에 조각 작품이 하나 덩그러니 앉혀 있다. 한 여인이 죽은 아들을 안고 있는 조각상이다. (24. 08. 20)

#2. 프라하 여행 이튿날, 걸어서 구시가를 걸으면서 전반적인 이미지를 확인할 참이었다. 사람들이 많이 가는 쪽으로 방향을 잡았다. 조금 너른 인도 가운데에 가설 시장이 열려 있었다. … 아내는 과일 가게에서 납작 복숭아를 사려고 했다. 아침을 든든히 먹고 나와 별로 당기지는 않았지만 … 말리지는 않았다.(24. 8.16)

 #3. 베를린을 여행 중이다. … 베를린에는 부란텐부르크문 앞으로 박물관 섬까지 '운테르 덴 린텐' 거리가 있다. '보리수나무 아래'라는 뜻을 가진 예쁜 길이다. 그 길을 걷다가 작지만 놀라운 것을 발견했다. 넓은 베벨 광장 중앙 바닥에 작은 동판 둘, 그리고 그 옆에 한 변이 1m쯤 되어 보이는 정사각 유리블록 하나 깔려 있었다. 멀리서 보면 빗물 배수구처럼 보여 사람들은 그것이 있는 있는 줄도 모르고 지나갔다. (24.8.12)


 나는 내 뜻대로 자연스럽게 시내를 다니다가 우연히 좋은 건축이나 시장이나 광장을 만나면 그곳에서, 그야말로 인연처럼 무언가를 발견하고 감동한 것에 흡족하였다. 그 만족한 느낌을 기행문처럼 몇 편 글로 남기기도 했으니, 참 의미 있는 여행이었다. 그리고 이 글을 아내에게 보여주었다. 아내는 “열심히 썼네요. 참 수고했어요. 다음에도 또 여행 같이 가십시다.” 응답해 주었다.


 며칠 전 아내의 펼쳐진 빨간 수첩에서 다음 글을 발견했다.

 ### “오늘은 베를린 첫 여행이다. 내 계획대로 독일 의회 회관을 거쳐, 가장 유명한 브란텐부르크문 주변을 집중적으로 보고 운터덴린덴 대로를 따라 박물관 섬을 향해 걸어가다가, 훔볼트 대학 근처에 있는 유명한 조각품이 있는 ‘노이에 바헤’를 거쳐, 독일의 분서 사건 현장에 설치한 ‘빈 서가’까지 보았다. 다행히도 남편은 오늘 봤던 것이 모두 자연스럽게 걷다가 우연히 들린 줄 안다. 내가 미리 계획하여 그곳으로 방향을 잡은 줄 모르고, 내가 미리 검색하여 관련 정보를 다 읽어 둔  것을 가지고 설명해 준 줄도 모르고, 처음 발견하는 감동을 제대로 느끼고 있다. 케테 콜비츠의 작품을 확대 제작한 조각품을 보고는 눈물을 글썽이는 것을 보면 평화 감수성 하나는 발달한 것 같다. 내일은 상수시에 가는 계획을 짜고 있는데, 남편이 그곳도 자연스럽게 가게 되었으면 좋겠다. 다행히 상수시엔 포츠담 회담이 열렸던 특별한 곳이 있으니, 이곳을 살짝 흘리듯 말하면 자연스럽게 낚이지 않을까?”


부처님 손바닥 안에서 논 기분이다. 그렇다고 화를 낼 수도 없는 노릇이다. 나도 나름 만족했고, 그 사이 시간은 흘렀고, 아내의 수첩도 몰래 봤으니 말이다. 이번 여행에는 내가 참 많이 기여한 줄 알았다. 나의 여행 지론에 따라 자연스러운 행보에, 우연한 만남을 추구한 줄 알았다. 알고 보니 전 일정이 아내의 철저한 공부와 계획에 따라 진행된 것이었다. 내가 저곳에 한 번 가보자 했던 곳도 사실은 아내가 그곳을 향하여 방향을 잡은 거였고, 납작 복숭아가 비싼데도 불구하고 산 것도 내 허약 체질을 알고 준비한 것이었다. 혹 갑자기 내가 주장하여 전혀 계획에 없던 곳으로 가자고 하면, 그쪽으로 살짝 가 주었다가, 그 주변에 있는 나중 계획된 곳으로 나를 살짝 이끌었다.


 나는 도가 사상의 무위자연(無爲自然)이 무엇인지 잘 안다고 생각했다. 나의 계획 없는, 물 따라 바람 따라 여행법도 무위자연을 반영한 여행법이라고 자부했다. 그런데 아내의 계획적인, 너무나 철저히 준비한 여행법이야말로 더 무위자연으로 보였다. 노가나 장자가 말한 무위자연은 과연 어디에 가까울까? 처음부터 인위적인 것이 섞이지 않고 저절로 그렇게 되는 성질에 맡기고 흘러가는 것일까? 아니면 철저히 준비하여 남들이 알아차리지 못할 정도로 자연스럽게 이끌어 가는 것일까? 무엇이든 간에 이번 여행에서 나는 내 아내의 무위자연의 손바닥 안에서 놀았던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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