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환타타타 Sep 07. 2024

그림 문외한의 그림 감상법

무하의 '네 가지 예술' 그림을 보고

아내의 기묘한 가이드에 이끌려 무하 미술관에 가게 되었다. 나의 우연 중심 여행법에 따라 자연스럽게 걷는다고 걸었는데, 아내의 마음속 계획에 따라 알폰스 무하 미술관에 들어가게 되었다. 무하라는 화가는 그때가 처음이었다. 나도 모르는 유명한 화가가 있었단 말인가? 자존심이 상했지만, 입구에 걸려있는 그림 몇 점 보고는 다행이다 싶었다. 그림이 그다지 좋아 보이지 않았다. 입장료가 아깝다는 생각을 했다.

     

걸려 있는 그림들이 대체로 채색이 옅은 3도로 인쇄된 삽화 같았다. 그림 내용은 죄다 여성 인물도인데 같은 모델을 자세만 바꿔가며 그린 것 같았다. 자세히 보니 인물이 제각각 다르고, 인물들을 감싸고 있는 둥근 프레임의 디자인도 조금씩 달랐다. 인상파 그림처럼 강렬한 인상도 없고, 추상화 그림 같은 애매모호한 호기심도 주지 않았다. 타로 카드에 그려진 그림처럼 어떤 상징을 나타내는 포즈나 문양을 그린, 중견 연습생들이 그린 습작처럼 보였다. 우리 집 거실 벽에 걸어두고 싶지는 않았다. 곧장 나가고 싶었어나 들어오려는 사람들 줄의 길이를 보고 조금 더 감상하기로 했다. 도대체 이 화가가 뭐가 그리 대단한 거야? 

    

심심한데 그림 제목이나 읽어보자. 다행히 영어로도 표기되어 있었다. ‘네 가지 예술’이라는 네 그림 묶음이 눈에 띄었다. 각각의 제목이 따로 있다. 시[poetry], 무용[dancing], 음악[music], 미술[painting]! 좋다. 아무리 예술의 문외한이지만 그림 제목까지 알면 그림이 좀 읽히겠지! 왜 이 그림에 그 제목을 붙였을까? 아니, 이 제목의 그림을 왜 그렇게 표현했을까? 질문을 하며 찬찬히 그림을 보았다.

      

‘무용’이라! 그래 발꿈치를 들고 가슴을 내밀고 고개를 뒤로 부드럽게 젖히고 몸을 한 바퀴 살짝 돌릴 때 머리카락 휘날리니 영락없는 무용 맞다. 그래! 그림이란 자고로 감상자가 알아보기 쉽게 그려야지. 그러면 나도 미술관에 자주 올 텐데! 아! 춤사위가 참 편안하면서도 요염하네! 교태를 부리는 것 같기도 하고 넘치는 기쁨을 주체 못 하는 것 같기도 하구나! 그런데 ‘시’의 모델은 왜 저런 폼을 하고 있을까? 로댕의 ‘생각하는 사람’ 포즈로 앉아 있는 여인이라니? 생각하는 사람은 철학이지 시인이 아니지 않은가? 세상을 보고 느낀 감정을 시적 언어로 번역해 내는 중인가? 시인이 저렇게 진지하고 무거운 존재였나? 나 같으면 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러보는 모습을 그리련만.

     

그리고 ‘음악’은 저게 뭔가? 두 손을 목덜미에 다소곳이 대고 있는 여인의 그림이라니. 악기 하나 안 보이고, 노래를 부르고 있는 것은 아니고, 밖에서 들리는 음악에 귀를 기울이는 모양인가? 아! 약하다 약해! 입을 벌리고 열창하든지, 악기를 열정적으로 연주하든지, 아니면 한 없이 부드럽게 눈을 감고 미세한 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포즈를 취해야 한다고 보는데, 음악적 요소가 너무 없다. 혹시 직접적인 표현을 과하다고 여기고 삼가는 걸까? 내가 모르는 음악의 여신이 있어 자기만 들을 수 있는 감미로운 진동을 느끼고 있는 걸까? 손을 좀 더 귀밑으로 조금 더 올려 그렸으면 더 좋으련만. 

    

‘그림’이라는 제목의 그림은 더 그렇다. 그림 그리는 도구는 하나도 안 보이고, 꽃 한 송이를 한 손으로 살포시 잡고 있는 여인의 모습이다. 이것도 전혀 그림과 직접 관계가 없다. 억지로 연결하자면 그림을 그리기 전에 그림 대상인 꽃을 충분히 관찰하고 느껴보는 모습을 그린 것 같다. 이 또한 제목과 관련된 주제를 드러내기엔 연결 고리가 약하다. 차라리 우아한 자태로 캔버스 앞에 앉아 붓질하는 모습도 괜찮은데, 굳이 꽃을 어루만지는 모습을 한 여인을 그린 그림에 ‘그림’이라는 제목을 붙이다니 너무 심했다. 

     

이러는 사이에 시간은 흐르고, 아내의 미술 감상 동선도 끝나 우리는 미술관을 나왔다. 아내에게 무엇을 보았는가? 물으니 아르누보 양식의 그림 어쩌고 저쩌고 동문서답이다. 나는 그림을 보고 한 가지 느낀 게 있다고 했다. “알폰스 무하의 그림은 매우 상징적이다. 그의 그림 기본 구도는 아치형 틀 속에 여성 인물화인데, 제목은 추상명사이다. 여성의 각기 다른 포즈, 각기 다른 옷차림, 각기 다른 장식물로 주제를 표현하고 있다. 그래서 제목과 그림을 연결시키기는 쉽지 않고, 주제를 알아차리기는 더욱 어렵다. 악기나 노래 부르는 모습을 빼고 ‘음악’ 그림을 그리고, 붓질하는 모습은커녕 화판이나 이젤 같은 화구를 빼고 ‘그림’이라는 제목의 그림을 그리고, 시 한 줄 없이 ‘시’를 표현하고 있다. 나도 사랑한다는 말 한마디 없이 사랑하고 싶고, 아름다움 비슷한 말 한마디도 쓰지 않고 아름다운 글을 쓰고 싶다.” 아내는 저 양반 도대체 무슨 말하는 거야? 하는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그래도 나는 사랑한다는 말을 듣고 싶단 말이야.”

무하의 네 가지 예술(오른쪽 위부터 반시계방향으로 무용, 시, 음악, 그림)

작가의 이전글 귀신의 집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