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MZ평화의 길 15코스
DMZ 평화의 길 15코스는 의미 있는 공간이 여럿 있어 인상 깊다. 시작점인 백마고지역, 너른 들판을 지나 소이산 건너편에 있는 노동당사, 그 오른쪽 어깨를 넘어 개울을 따라가다 보면 불현듯 나타나는 도피안사, 조금만 더 걸으면 습지처럼 보이는 학 저수지, 알만한 사람은 다 아는 한탄강 주상절리. 곳곳이 의미가 가득한 공간이라 걸을 때마다 역사 탐방이요, 자연 답사이며, 지질 탐사였다. 그리고 남들은 그냥 지나치는, 나만 발견했다고 자부하는 특별한 장소를 발견하여 더욱 뿌듯했다. 그 이야기는 끄트머리쯤에서 나올 것이다.
동송읍에 차를 세워두고 농어촌 버스로 백마고지역에 닿았다. 한국전쟁 막바지에 중공군과 치열한 전투가 있었던, 10일 동안 12차례의 공방전으로 양측이 13,500명의 사상자를 낸 전투가 있었던 백마고지가 가까이 있다. 당시 얼마나 많은 포탄과 총알이 산을 뒤집어 놓았는지 하늘에서 보면 그곳이 마치 백마가 누워 있는 것처럼 보였다고 해서 생긴 이름이라고 한다. 지금은 그 정상에 태극기가 아주 높이 휘날리고 있지만, 당시 저 고지의 주인이 12번이나 바뀔 정도로 치열한 전투가 있었다니 이 고지가 전략적으로 왜 그리 중요했던가? 철원의 넓은 곡창지대를 지키는 저지선이었을 것이다. 안타깝고, 고맙고, 간절한 느낌을 동시에 받았다. 간절함은 평화에 대한 감정이었다.
백마고지역 건너편 너른 들을 가로질러 한참을 가다 보면 소이산이 나온다. 산이름이 좋아 찾아보니 한자로 所伊山이라고 되어 있다. 늦벼를 쇠노리라 하고 한자로 所伊老里로 표기하는데, 소이는 ‘쇠’를 소리만 나누어 표기한 것 같다. 그러니 소이산은 아마도 ‘쇠 산’, 즉 소 모양의 산(?) 아닐까 한다. 소이산 남쪽 어깨를 돌아 동편을 보니 철원 역사문화공원이다. 소이산으로 모노레일을 깔아 놓아 정상에서 백마고지와 철원 너른 들판을 한눈에 볼 수 있게 해 두었다. 우리는 굳이 모노레일을 타고 정상에 오를 필요성을 못 느꼈다. 구석구석을 발로 걷고 있기 때문이다. 정말 보고 싶은 곳은 공원 건너편에 있는 노동당사였다.
1945년 광복이 되고 1948년 38도선을 경계로 분단이 완성되었을 당시 이곳 철원은 북한 땅이었다. 그리고 바로 이곳에 북의 정치 입법부 최고 정당인 노동당의 당사가 있었다. 규모로 보아 당시 노동당의 위상을 알만하다. 노동자 즉 프롤레타리아 계급의 이익을 대변하고, 공산 혁명의 주체이며, 혁명 이후 실질적인 평등화 작업을 뒷받침할 정당이었으니, 어려운 형편임에도 불구하고 이 정도 규모의 당사가 필요했을 것이다. 한국전쟁 중 이곳이 격전지가 되어 당사는 불탔고, 이후 이 지역을 뺏기면서 당사는 뼈만 남은 체 남한 땅에 남게 되었다. 분단 이후 노동이라는 말을 터부시 하여 노동 대신 근로란 말로 대체했던 시절에도 이 건물의 이름만은 노동당사로 계속 사용된 것은 아이러니하다. 반공 교육의 장으로 활용될 수 있었기 때문인데, 지금은 평화 교육이나 통일 교육의 장으로 활용되고 있어 참 다행이다.
도피안사는 절도 예쁘장하여 구경할 만하지만, 그 이름이 의미 깊어 기억에 남는다. 한자로 到彼岸寺(도피안사)인데 ‘도’가 ~에 도달하다, ~에 이르다는 뜻이다. ‘피안’은 저 언덕이란 뜻으로 깨달음을 얻은 경지, 즉 해탈 또는 열반을 상징한다. 그러면 도피안사는 “깨달음(해탈)에 이르는(도달한) 절”이다. 즉, 우리 절에 오면 해탈할 수 있거나, 해탈한 경지처럼 마음의 평화를 얻을 수 있다는 의미이다. 한 가지 아쉬운 것은 ‘도’가 한자로 渡(건너다)가 아니라 到(이르다)라는 점이다. 저 언덕으로 건너가기 위해 바른 깨달음을 추구하는 절이야말로 절의 존재 의미를 잘 드러낼 것 같아서다. 이 절 안에 있는 국보 63호 ‘철조 비로자나불상’에 얽힌 전설도 있었지만 상투적이고 불교의 사상과 거리가 있어 보여 소개하지 않는다. 다만 원래 철불이었는데, 그걸 더 귀하게 만든다고 금을 덮어씌운 적이 있다고 한다. 유홍준 작가가 그의 책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에서 이를 비판적으로 아쉬움을 표현하자 나중에 다시 벗겨내고 처음 그대로의 철불로 보존하고 있다고 한다. 문화적, 미학적, 인문학적 통찰력을 지닌 자가 쓴 글의 위력을 보여주는 사례다.
도피안사 입구 오른쪽 산모퉁이를 돌아 조금 걸어가면 학저수지가 나온다. 얼핏 보면 그냥 자그마한 저수지 같은데 데크를 따라 걷다 보면 저수지의 숨은 모습이 자꾸 나타나 결코 작은 저수지가 아님을 알게 된다, 곳곳에 모래톱과 갈대밭이 있어 마치 거대한 습지처럼 보인다. 저편에서 철새 떼 수천 마리가 한꺼번에 날아올라 하늘을 가릴 정도다. 그야말로 장관이다. 이것만으로도 학저수지가 얼마나 중요한지 알겠다. 휴전선 가까이 있는 덕에 개발의 유혹에서 벗어나 보존되고 있는 듯했다. DMZ에서 조금 떨어진 이곳이 이 정도로 보존되는데, DMZ 안은 얼마나 천연하게 보존되어 있을까? 휴전선에서 남북으로 각각 2Km, 총 4Km 폭으로 동서로 250Km 길이로 보존되고 있는 DMZ, 전쟁의 긴장이 감도는 지역이 오히려 환경 보전에 이익이라니! 차라리 이참에 통일되기 전이라도 남북이 합의하여 이 지역을 세계자연유산으로 지정받아, 생태 공원으로 만들어 버리면 평화와 환경을 한꺼번에 잡을 수 있지 않을까!
15코스 마지막 25%는 한탄강길이다. 한탄강은 강둑이 없다. 평평한 평야 바닥이 뱀처럼 길쭉하게 그냥 푹 패어 절벽을 이루며 형성된 강이다. 지질학적으로는 용암이 분출되어 흘러간 자리가 침식되어 생긴 강이다. 강 양쪽 벽은 용암 절벽이고 그 절벽 끝 스카이라인이 곧 철원평야 논바닥 라인이다. 우리가 걷는 길은 한탄강 절벽을 따라 왼쪽 아래는 강물이 흐르고, 오른쪽은 벼 벤 자국이 선명하게 남아 있는 너른 논이다. 도중에 만나는 칠만암은 작은 금강산이고, 직탕폭포는 작은 나이아가라 폭포였다. 이 강은 워낙 유명하고 많은 사람들이 다녀가 두 말할 필요를 못 느낀다. 대신 이 길 어느 즈음에서 발견한 귀한 곳하나에 대해 말하고자 한다.
그곳을 언뜻 보고 “참 별스럽네” 하며 빠르게 지나가고 말았지만, 그 정경이 뇌리에 계속 남아 생각해 보니 예사롭지 않은 곳 같았다. 걷는 길옆 1000여 평 되는 논 귀퉁이에 10평 남짓한 땅을 1m 정도 돋우고 잔디를 깔아 소박하게 꾸민 동산 같은 마당이었다. 잔디 마당 한가운데 벤치 하나 놓여 있었다. 마치 어린 왕자가 지는 해를 보려고 놓아둔 의자처럼. 처음엔 그 의자가 그냥 지나가는 나그네 쉬어가라고 둘레길을 조성할 때 함께 만들어진 줄 알았다. 생각해 보니 그 벤치 앞 잔디밭에 꽃 한 포기 심겨 있었다. 그리고 꽃 옆에 잔 같은 게 두 개 놓여 있었던 것 같다. 그러면 그 동산이 무엇이라고 생각되는가? 형식이 다른 무덤 아닐까? 무덤인데 묫자리를 작은 동산으로 꾸미고, 봉분 대신 꽃을 심고, 비석 대신 벤치를 놓았다. 길 가는 나그네에게 잠시 쉬어가는 공간으로 허락한 무덤이다. 이게 정말이라면 장묘 문화의 혁신이다. 봉분에서 평평한 평장으로, 평장에서 나무 아래 수목장으로, 이제는 수목장에서 벤치가 있는 동산장으로. 혹 이 동산에 대한 나의 추측이 틀릴 수 있으리라. 그렇다 하더라도 그것은 새로운 장묘 문화에 하나의 힌트가 될 수는 있다.
이렇게 15코스를 걸으며 의미 있는 공간을 많이 만났다. 걸어서 천천히 가다 보면 이렇게 보이는 것이 많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