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치 앨봄, '모리와 함께한 화요일'을 읽고
‘죽음’이라는 주제는 인간의 가장 오래되고 가장 큰 화두이다. 어려서부터 나도 죽음을 가장 두렵게 생각했고, 죽는다는 사실 때문에 인생이 허무하게 느껴진 때가 많았다. 그래서 오래전부터 죽음에 대한 철학이나 종교적 사유에 관심이 많았다. 그러나 기독교의 ‘지상의 나라 천상의 나라’ 논리는 이성적으로 동의하기 힘들고, 불교의 연기설은 진리로 세상의 변화를 설명하고도 남을 진리성을 갖고 있지만 구체적 나의 죽음 문제에 대한 답으로는 막연하다. 그리고 개체적 윤회설은 받아들이지 않는다. 죽음을 영혼의 해방으로 본 플라톤의 생각도 영원히 죽지 않는 영혼을 믿지 않아 그냥 ‘설’로만 알고 있다.
그나마 에피쿠로스의 아포리즘 “죽음은 우리에게 아무것도 아니다. 우리가 살아 있는 한 죽지 않았고, 죽으면 삶을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는 죽음을 무시하면서 삶에 집중하는 데 도움이 되었고, 하이데거의 “죽음으로 미리 달려가 봄으로써 개별화된 현존재는 비로소 자신의 전체성 속에서 자신의 가장 고유한 존재를 확신할 수 있다”라는 가르침은 본질적인 삶을 생각하는 계기가 되었다. 하지만 모리와 미치의 공동 보고서, <모리와 함께한 화요일>만큼 죽음을 생생하게 느낄 수 있는 계기는 없었다. 이 책은 철학적 아포리즘이 아니라 실존적 보고서이기 때문이다.
모리는 대학교수이고 리치는 그의 제자이다. 인기 있는 대학 교수 모리 밑에서 공부한 후 리치는 스포츠 신문의 칼럼니스트로 활동하던 중, 방송에서 스승이 루게릭병에 걸려 투병 중인 것을 알고 찾아간다. 모리는 리치에게 마지막 보고서를 제안하는데, 그 보고서란 곧 리치가 죽어갈 때까지 매주 화요일에 만나 토론(수업)을 하고 기록하는 것이다. 내가 보기에 보고서의 제목은 <죽음 맞이 모범>이라 하면 좋을 것 같다. 모리가 리치에게 해 준 주옥같은 강의 내용의 핵심은 "우리 문화가 제대로 된 문화라는 생각이 들지 않으면 굳이 그것을 따르려고 애쓰지 말게"였다. 이는 현대 철학에서 강조하는 ‘남 따라 살지 말고 자신의 삶을 살라’와 크게 다르지 않다. 이건 너무나 당연하고 중요한, 그래서 그냥 받들어야 하는 지상명령이다.
죽음에 맞닥뜨리는 그의 태도는 더 감동적이다. 그의 죽음 맞이 태도는 몸으로 직접 보여주는 것이라 말로 표현이 어렵다. 각자 책을 읽으며 느낄 수 있을 뿐이다. 그럼에도 내 수준에서 억지로 정리하자면 다음과 같이 요약된다. 죽음에 대한 관조적이고, 죽을 때까지 삶을 살아내고자 하고, 두려움이나 고통스러운 감정에 솔직하되 그 감정에 매몰되지 않는 태도!. 그중에 내 마음에 가장 감동적이었던 것은 ‘죽을 때까지 살아내는 거’였다. 이건 삶에 집착이 아니라 마치 숭고한 의무 수행이었다. 의무는 왜?, 라며 묻지 않는다. 그냥 하는 거다. 그냥 끝까지 살아내는 거다.
특히 모리가 기획한 살아 있을 때 치르는 장례식, 제자와 함께 수행하는 마지막 수업, 병의 고통과 두려움을 이겨내는 그만의 방식, 힘이 남아 있는 한 누군가에게 희망을 주는 편지 답장 등은 그의 표현을 살려 말하자면 “자기 죽음 과정조차도 자기가 창조하는 삶의 문화에 편입시키고자 하는” 그의 필사적 기획이었다.
누구나 죽는 죽음. 두렵기도 하고 허망하기도 하지만 어쩔 수 없이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나의 죽음. 그 죽음을 잘 죽는 방법은 건강할 때 잘 사는 것이고, 잘 산다는 것은 자기 문화를 자기가 만들어 가는 것이다. 건강할 때 자기답게 잘 살아야 하는 것은 두말할 나위 없지만, 죽을병이 걸려서도 자기답게 죽어가는 문화적 기획을 할 수 있다면 이것이야말로 웰-다잉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