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성스러운 삶을 오래 지속하기 위하여
내가 남긴 흔적을 보면 나의 정체성이 고스란히 드러납니다. 내가 사는 공간, 입는 옷, 먹는 음식, 읽는 책의 흔적을 합치면 내 삶의 모양이 다큐처럼 찍합니다. 여권에 찍힌 도장을 보면 내가 어디로 다녔는지를 알 수 있는 것처럼 말이지요, 나의 정체성은 나의 말이나 글에서도 드러납니다. 나의 행동거지나 표정에서도 새겨집니다. 그러니 내가 어찌 아무렇게나 입고, 대충 먹고, 함부로 말하고, 가볍게 행동하겠습니까? 어찌 매사에 조심스럽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어찌 마음을 다하고 힘을 다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매사에 조심스럽게 접근하는 태도는 다산 정약용에게서 배웁니다. 그의 당호 ‘여유당’은 겨울 시내를 건너는 것처럼 조심스럽고 [與], 사방에서 나를 엿보고 있는 것을 경계하며 [猶] 살아가려는 의지를 담은 것이라 합니다. 하늘이 나의 모든 행실을 보고 있고, 타인들이 나를 보고 있을 뿐 아니라, 내가 남기는 모든 흔적이 나의 행실을 기록하고 있으니, 매사에 조심스럽게 경계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예수가 제자들에게 ‘항상 깨어 기도하라’고 주문한 것이나, 퇴계가 경(敬)을 말하면서 ‘항상 깨어 있으라 [常惺惺]’을 강조한 것도 같은 맥락에서 나온 말일 겁니다.
정성[誠]을 다하는 것에 대해서는 율곡 이이가 특히 중시하였습니다. 율곡 이전에 동양 고전 <중용>에서는 이를 거의 형이상학적 진리에 가까운 것으로 자세히 논하고 있지요. 여기서 말하는 정성은 곧 정직함, 꾸준함, 힘을 다함을 합친 의미입니다. 정성이 있으면 사람의 마음을 얻고, 하늘을 감동시키며, 결국 일을 이루어지게 하는 마음의 덕성이자, 삶의 태도이자, 우주의 진리입니다. 작은 일이라도 소홀히 할 수 없는 것은 모두 이 때문입니다.
하지만 매사에 조심스럽고 정성스럽게 사는 삶은 ‘참을 수 없는 존재의 무거움’으로 와닿습니다. 무거운 짐을 어깨에 짊어지고 사는 ‘고달픈 삶’의 이미지로 와닿습니다. 정말 그렇다면 정성의 본래 뜻이 왜곡된 것입니다. 정성스러운 삶은 결코 무겁다기보다는 오히려 맑고, 따뜻하고, 쾌활한 것입니다. 왜냐고요? 다시 정성의 세 가지 요소[정직, 꾸준함, 힘을 다함]를 생각합니다. 정직하면 마음이 가볍기 때문입니다. 꾸준한 삶은 좋은 습관으로 자리 잡기에 자연스럽기 때문입니다. 힘을 다 쏟아내는 중이나 힘을 다 쏟은 후에 찾아오는 존재의 기쁨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성을 다하는 삶에 에너지가 많이 들어간다는 사실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정성을 다하려 하지만 힘이 모자라 그러지 못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정성을 다할 때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선택과 집중입니다. 중요한 것과 급한 것의 순서를 잘 살펴서 우선적인 것에 집중해야 합니다. 급한 일을 하느라 중요한 일을 놓치지 말아야겠습니다. 어떤 일을 할 때는 그 일에만 몰입해야 합니다. 힘을 뺄 곳은 빼 주어야 쏟을 곳에 제대로 쏟을 수 있습니다. 힘을 뺄 수 있게 될 때까지 치러야 하는 고된 훈련까지 피할 수는 없습니다.
정성을 다한다는 것은 모든 일을 완벽하게 처리하는 것이 아닙니다. 완벽을 추구하려다 뼈를 갈아 넣어 몸과 마음을 지치게 하면 끝내 쓰러지고 맙니다. 정성스러운 삶을 지속할 수 없게 됩니다. 그래서 정성을 다하는 삶은 완벽함을 추구하기보다는 온전함을 추구합니다. 완벽함은 티가 전혀 없는 것을 뜻하지만 온전함은 티를 포함하면서 전체적으로 조화로움을 뜻합니다. 티를 허용하는 여유로움이야말로 정성스러운 삶을 지속하게 하는 비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