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분한 여행

혹 거지 여행은 아닐까?

by 환타타타

너도나도 여행을 다니는 요즘에도 여전히 여행은 매력적인 문화 향유 방식이다. 여행은 자유, 여유, 견문, 지성 등의 가치를 상징한다. 여행을 많이 하는 사람은 그런 가치를 소유한 사람으로, 그런 품격을 지닌 사람으로 인식된다. 그래서 사람들은 열심히 일해서 돈을 벌고, 그 돈으로 여행을 떠난다. 여행을 떠난다는 것은 일시적인 자유와 여유와 품격을 구매하는 것이다. 우리 부부도 그런 시류에 편승하여 여러 나라를 다니고 시작했다.

남들이 많이 가는 나라를 중심으로, 남들이 남긴 여행 후기를 따라, 한 번 가서 여러 곳을 많이 보고 오는 방식으로 시작했다. 유명한 나라의 유명한 도시의 유명한 곳을 차곡차곡 다녔다. 견문이 좀 넓어지고 문화 지체가 해소되는 기분을 느끼며 전체적인 삶의 만족도가 높아지는 것 같았다. 언젠가는 전 세계를 샅샅이 훑어볼 욕심도 생겼다. 그러다가 쇼펜하우어의 여행에 관한 토막글을 보고 깜짝 놀랐다. “아차! 잘못하면 ‘거지 같은 여행’이 될 수 있겠구나!”


“인간에게는 권태가 마치 채찍과 같아, 그것에 얻어맞는 자들은 호주머니를 두둑하게 채우는 데에만 골몰하는 속물들이다. 그들은 안락한 삶에 빠지게 되면, 삶 자체가 형별이 되어 권태의 채찍에 시달리게 된다. 그들은 여기서 벗어나려고 이곳저곳 명승지를 찾아 여행이라도 다니면서 세월을 보내는데, 그 모습은 여기저기 구걸 다니는 거지와 다를 것 없다.” (쇼펜하우어,《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


쇼펜하우어는 ‘권태를 벗어나려고 여기저기 명승지를 찾아 세월을 보내는’ 형태의 여행을 하는 모습을 ‘한 곳에서 다른 곳을 찾아 구걸 다니는’ 거지와 같다고 표현했다. 여행이 기본적으로 다니는 것이기에 이곳저곳 많이 다니는 형태를 취하지 않을 수 없지만, 단순히 권태를 면하려고 다니는 여행이라면 그 모습은 거지와 다름없다는 것이다. 거지 같은 여행이 어디 권태를 면하려는 여행뿐이겠는가? 나 거기 가 봤다고 인정받기 위한 ‘찍고 여행’도 어쩌면 거지 여행과 같은 부류 아닐까?


우리 여행은 조금 달라야겠다고 생각했다. 우리는 우리들만의 속도로 우리 다운 여행을 하기로 했다. 패키지여행보다는 자유 여행을, 명소 관광 여행보다는 주제 중심 여행을 다니기로 했다. 좀 더 의미 있는 여행을 위해 남들이 잘 가지 않는 골목길 걷기, 예술 공연 관람, 건축물 관람, 위인 발자취 탐구 등으로 채웠다. 남들이 가는 곳은 물론 그 너머까지 보려고 노력했다. 우리 부부만의 자부심 같은 게 생겼다. 그런데 몸이 너무 피곤했다. 여전히 많이 다니며 많이 보는 양적 여행을 벗어날 수 없었다. 이제 우리도 충분히 쉬는 휴양여행 같은 걸 해볼까?


최근에 아내와 베트남을 다녀왔다. 여기저기 다니는 여행이 아니라, 한 곳에 길게 머물며 충분히 쉬는 휴양을 하자며 떠났다. 호텔 리조트에 머물며 먹고, 자고, 수영하고, 차 마시고, 얘기하고, 산책하기를 반복하며 보냈다. 해야 하는 일로부터 완전히 벗어나면 마냥 자유로운 줄 알았다. 그냥 쉬면서 그저 즐기면 안식이 되는 줄 알았다. 처음 이틀은 그랬다. 그러나 사흘째 되던 날 언뜻 따분한 기분이 들었다. 자유 여행의 피곤을 면하려는 휴양여행조차 권태로울 수 있음을 알았다. 호사로운 휴양조차도 거지 여행이 될 수 있음을 알았다.


단순히 돈 있고 시간 있어 ‘무위도식’한다고 휴양이 되지는 않는다. 쉽게 따분함에 빠지기 때문이다. 반면 ‘무위자연’의 삶은 결코 권태에 빠지지 않는다. 무위자연은 아무것도 안 하고 가만히 있는 게 아니라, 가장 자연스럽게 무언가를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더욱이 무위자연은 지난한 연습 끝에 도달하는 고도의 삶의 기술이기 때문이다. 곧 자연스럽게, 너무나 자연스럽게 뭔가를 할 수 있을 때 진정한 휴양을 즐길 수 있다. 베트남 호텔 리조트에서의 따분함은 무위도식과 무위자연을 구분하지 못한 데서 비롯된 것이었다.


앞으로의 여행이 기대된다. ‘찍고 여행’, ‘도피 여행’, ‘무-설렘 여행’은 피하고 싶다. 대신 목적과 의미가 분명한 ‘주제 여행’, 일상을 충분히 살면서 떠나는 ‘늘~상 여행’, 현지에서 새로운 것에 경이로울 줄 아는 ‘놀람 여행’을 지향하고 싶다. 이를 위해 일상을 충분히 살아낼 것이다. 혹 여행의 기회가 오면 충분히 준비하여 단순히 심심풀이 여행이 되지 않도록 할 것이다. 가서는 이미 알고 있던 정보를 확인하는 기쁨과 예견치 못한 경이로움을 충분히 느낄 것이다. 이런 여행을 나는 “충분한 여행”이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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