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적을 고칠 수 '있음'
3년 전 내 친한 친구 한 명이 죽었다. 죽음을 미화하는 어떤 수식도 빼고 그냥 죽었다. 친구는 천국으로 가지 않았다. 그이는 철저한 무신론자이고, 나 또한 비기독적 유신론자라 사후의 세계를 믿지 않기에 그렇다고 단언한다. 그는 차라리 자연으로 돌아갔다. 그는 철저한 비건주의자로 자연 치유법을 믿으며 자연 생식을 하며 살아왔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는 이 말도 쓰지 않으련다. 자연으로 돌아갔다고 말하는 순간, 그는 자연에 아직 존재한다고 해석될 수 있고 그러면 그의 부재를 부재 그 자체로 숙고할 수 없기 때문이다. 죽음은 어떤 존재가 있다가 없어진 것이다. 존재에서 비존재로 되는 것이다. 유(有)에서 무(無)로 된 것이다. 그래서 그냥 죽었다고 말한다.
그는 죽어 없지만 그와의 추억은 남아있다. 초등학교 4학년 때 만나 40여 년간 친구였다. 삼국지 주인공처럼 도원결의를 하고 혈서를 썼던 추억이 있다. ‘죽을 때까지 변치 말자!’라는 약속이었다. 혈서가 아니어도 우리는 변치 않았을 것이다. 서로의 잘됨이 서로에게 어떠한 시기나 질투심을 일으키지 않는 사이였기 때문이다. 그런 친구가 이제 없다. 그래서 그의 죽음은 나에게 특별한 사건이다. 이 일 이후로 그는 없고 나는 아직 있다. 나의 ‘있음’은 도대체 무슨 의미인가?
혹자는 말한다. 그의 육체는 죽었지만 그의 영혼은 살아있다고. 영원히 사는 영이나 혼이 있다고. 구천을 떠돌다가 다른 생명으로 다시 태어나는 영혼, 혹은 죽은 후에 구원을 받는 영혼이 있다고. 나는 이런 의미의 영혼은 믿지 않는다. 이것을 믿는 자들에겐 그들의 생각 속에 있는 관념일 뿐이다. 관념도 존재하는 것이라고 한다면 귀신도, 용도, 천국도, 지옥도, 각종 괴물도 존재한다고 보아야 한다. 그러나 없다. 굳이 있다면 이것이 비유하고 상징하는 원관념이 따로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어떤 사람이 실제로 그런 것들이 있다고 믿고, 그 존재를 증명하며 다니고, 그것들과 관계를 맺고 다닌다면 나는 고개를 살랑살랑 흔들며 입을 다물 것이다.
다른 혹자는 말한다. 그가 남긴 흔적들에 영혼이 깃들어 있다고. 흔적들에 깃들어 있는 것이 영혼이라면, 그가 남긴 물건, 작품, 언행, 업적 등에 얽힌 이야기나 추억일 텐데, 그렇다면 영혼은 그 이야기나 추억 등에 담긴 ‘정서나 의미’ 아닌가? 그런 뜻의 영혼이라면 받아들일 수 있다. 그리고 흔히 말하는 영적인 사람이란 영혼이 있다고 믿는 사람이 아니라, 삶의 겉모습 너머에 있는 어떤 것을 볼 줄 알고, 그런 가치를 추구하는 사람일 것이다. 이런 영혼관을 가진 나는 진지하게 묻는다. 내 친구보다 조금 더 길게 ‘있음’이 무슨 의미인가?
내 친구는 그의 지인들 각자에게 나름의 흔적들을 남겨두고 갔다. 나에게도 책 한 권 정도의 흔적을 남겨두고 갔다. 그리고 그 흔적들은 내 기억력에 따라, 내가 부여하는 의미에 따라 다른 인상으로 변하면서 점차 희미해질 것이다. 그의 흔적은 이미 새겨졌고, 순전히 남아있는 지인의 회상 능력에 따라 존재를 드러낼 것이다. 그러나 내가 남길 흔적은 아직 진행 중이다. 마지막 그날까지 내 흔적들을 새길 것이지만 어떤 문양이 아직 결정되지 않았다. 그렇다면 그의 ‘없음’은 그의 흔적을 그가 바꿀 수 ‘없음’이다. 나의 ‘있음’은 아직은 나의 흔적을 바꿀 수 ‘있음’이다. 사람들의 기억 속에 남겨질 나의 이야기를 퇴고할 수 있다는 것, 이것이 내가 아직 ‘있음’의 의미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