늙은 반려견을 보살피는 N에게서 仁(인)을 봄
내 지인 N이 생뚱맞은 사진을 보내왔다. 거실 바닥에 하얀 부직포 같은 것을 쭈욱 깔아놓은, 전혀 볼품없는 실내 풍경이다. “공사해?” “아니, 초코 때문이야.” “아! 초코가 아프다며?” “이젠 아픈 것을 넘어 아무 데나 배변을 해. 그래서 키친타월을 깔았지.” “에고, 너무 힘들겠다. 병 수발 들랴, 똥 치우랴. 기도해 줄게.” “고마워!, 하지만 괜찮아.”
초코는 N이 키우는 반려견 이름이다. 지금은 너무 늙어 하루 종일 잠만 자고, 아무 데나 배변한단다. 귀먹어 주인도 발자국 소리도 못 듣고, 눈멀어 여기저기 부딪힌다. 죽을 고비를 몇 번이나 넘기며 병원도 여러 번 다녀왔다. 그때마다 지극 정성으로 치료하고 보살펴 지금까지 연명하고 있다. 강아지를 키우지 않는 나로서는 처음엔 ‘저렇게까지 해야 하나’며 달갑지 않았으나 지금은 감동하고 있다. 꼬리 치며 애교조차 부리지 못하는, 노망 들어 여기저기 똥오줌 싸는, 18살 늙은 개를 온 마루에 키친타월을 깔아가며 보살피는 N 가족에게서 존경심까지 느낀다.
N은 강아지를 단순히 반려견으로만 여기지 않는다. 고향에 계신 부모님을 대하듯, 아내와 자식을 대하듯 진심으로 대한다. N은 가족과 사람들을 더 귀하게 여기지만 그렇게 큰 차이를 두지 않는다. 나는 N이 부모님에게 얼마나 잘하는지 안다. 그의 효행은 여러 행태로 보이는데 나열하자면 봉양, 양지, 공대, 불욕 같은 예스러운 기준조차 채우고도 넘친다. 그가 주변 동료들에게 하는 따뜻한 언행들도 그 연장선 위에 있다. 뭐든지 베풀려고 하고, 챙겨주려 하는 모습이 부모에게 하는 것처럼 따뜻하다. N이 반려견에게 하는 행동도 그 확장판임을 이번에 알았다.
뭇 반려견 주인들이 모두 그렇게 하는 것 같지는 않다. 버려지는 개들을 보면, 빈집에 홀로 며칠씩 지내는 개들을 보면 안다. 어떤 주인은 개를 좋아하기는 하지만 사랑하는 것 같지는 않다. 꼬리 쳐 줄 때만 좋아하고 늙고 병들면 귀찮아한다. 또 어떤 주인은 사람보다 개를 더 좋아한다. 부모를 공경하지도 보살피지도 않으면서 개에게만은 지극 정성이다. 나는 이런 사람들의 동물 사랑을 의심한다. 여차하면 버릴 준비가 된, 심심풀이 사랑이 아닐까 한다. 그런 사람들에게 개는 반려견이 아니라 애완견이다. 그런 주인을 보면 근본으로 되돌아가야 한다는 생각이 든다.
유교에서는 사랑[仁; 인]을 강조하며 효(孝)를 인의 근본[本]이라고 한다. 공자가 특히 강조하는 인은 ‘가깝고 먼 정도에 따라 차이가 있는’ 사랑이다. 이것에 대해 묵자는 그런 차이조차 없는 보편적 사랑[겸애; 兼愛]을 강조한다. N의 성품에서 공자의 인(仁)이 느껴진다. 부모에게 하는 사랑이 가족 사랑으로 넓혀지고, 그 친근함이 친지와 지인들에게까지 도달한다. 인간에 대한 따뜻함이 동물에까지 확장된다. 그래서 그의 반려견 사랑은 자연스럽다. 과하지도 않고 억지스럽지도 않다. 가까운 사람에 대한 사랑에 기초하고 있기 때문이다. N을 보면 내 부모님이 생각난다. 인간의 근본 도리를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