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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로케 Oct 25. 2021

설레임 기획

중1때 음악을 듣고 싶어서 학교 마치고 늘 동네 PC방에 갔다. 집에 인터넷이 없었기 때문이다. 담배 냄새와 방향제가 섞인 쾌쾌한 냄새와 벽에는 스타크래프트 포스터가 덕지덕지 붙어 있고 내부 조명은 어둡고 백색 모니터가 즐비한 PC방이었다. 컴퓨터가 20개 남짓한 작은 PC방이었기 때문에 시끌벅적 스타크래프 하는 애들 틈바구니 속에서 게임은 안하고 매일 벅스 뮤직 켜놓고 헤드폰 낀채 멍하니 음악만 1시간 듣고 가는 나를 사장님은 이상하게 봤다. 그렇게 음악을 듣다가 앨범값 보다 PC방 값이 더 나올 거 같아 부산대학교 앞에 있던 신나라 레코드 점에서 앨범을 샀다. 그때 내가 듣던 음악은 BSB나 엔싱크 위주의 틴팝 계열이었고 그 뒤로 브릿팝이나 하드록쪽으로 넘어왔다.


그때는 모든 것이 신세계였다. 내가 손 뻗고 발 닿는 곳마다 새로운 무언가가 싹폈다. 벅스 뮤직을 돌아다니며 좋은 노래를 발굴하고 탐사하는 과정이 짜릿했다. 나 이전 세대가 매일 라디오를 틀며 최애곡이 나오길 기다렸듯이  난 V채널을 하염없이 틀어 놓으며 내가 좋아하는 팝아티스트의 뮤비 나오길 기다렸고 새로운 아티스트를 발견하기도 했다. 


스타크래프트 보다 음악을 더 재밌어 했던 그때가 조금 그립기도 하다. 천원을 지불하고 1시간 동안 음악을 듣던 설레임을 이제 느낄 수 없기 때문이다. 취향저격하는 좋은 음악을 발견했을 때의 짜릿함도 사라졌다. 과거의 것을 부여잡고 안 놓아줄 생각은 없다. 다만 과거의 것이 하나둘 사라지는 속도와 양만큼 새로운 것이 빨리 채워지지 않을 때 왠지 모르게 스산하다. 단순히 나이가 들어서 익숙해져서 무뎌졌다고 하기에는 근본적이 이유라고 생각지 않는다.


자아가 형성되기 시작할 때는 모든 것을 흡수하며 전율하기 바빴다. 하지만 어느정도 자아가 완성되고 난 후에는 자신의 자아에 안주하고 매몰된 채 세상을 살게된다. 늘 자신과 닮은 익숙한 자아 속에서 살다보면 설레임이 비집고 들어올 공간은 없다. 지나가다 듣는 좋은 음악에도 설레였고 스쳐가는 문구에도 짜릿함을 느끼며 완성된 자아는 이제 가지고 놀지 않는 우디와 버즈가 된다.


이제 내 스스로 설레임을 기획하지 않으면 설레임은 쉽게 찾아오지 않는다. 익숙한 지금의 자아라는 영토에서 벗어난 새로운 자아의 영토를 개척하는 행위에서 설레임은 찾아온다. 새로운 시도와 도전을 통해서 내 안의 또 다른 나를 발견할 때 난 설레임을 느낀다. 과거에는 외부에서 설레임을 찾았다면 지금은 내 안에서 설레임을 찾는다. 지금의 자아를 벗어던질 수 있는 용기에서 새로운 설레임이 찾아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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