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오르고스 란디모스의 <송곳니> 비평
영화 ‘송곳니’에서 주목해야 할 것은 담장 안의 세계를 바라보는 타자의 시선이 없다는 점이다. 물론, 아들의 성욕 해소를 위해 끌어들인 여성 경비원이 있지만, 그녀는 이 집 안의 시스템에 둔감하거나 관심이 없는 듯하다. 이들과 정반대 선상에서 관객의 입장을 대변해 줄 만한 타자의 시선이 없다는 것은 그 담장 안의 세계가 얼마나 견고한 시스템으로 이루어져 있는지 강력하게 나타낸다. 그러므로 이 영화는 매우 단순한 구조이기도 하다. 영화 속에서 서로 다른 시선이 서로 교차하거나 충돌을 일으키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영화는 단지 이들의 비정상적인 습성과 시스템만을 관객들에게 노골적으로 드러낼 뿐이다. 여기서 관객이 사유하는 지점은 억압적 권력의 표상이 아니라 담장 밖 세계와 정반대로 돌아가는 담장 안 세계의 시스템이 구축되는 원리다.
지오로그스 란디모스 감독은 그 통제 원리를 정치, 자본, 과학이라는 외부적 도구를 이용한 거시적인 억압이 아니라, ‘언어의 의미 통제’라는 근본적인 통제 원리를 제시한다. 그것은 담장 밖 시스템과 동화되지 못하는 절대적인 타자의 입장에 삼 남매를 서게 한다. 그러나 삼 남매에게는 이미 동화와 타자화의 원리는 적용되지 못한다. 그들은 자기와 대립하는 이항 세계에 대한 개념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사실상, 감독이 말한 듯이 이것은 미디어 권력의 속성을 잘 보여준다. 미디어는 철저한 타자화의 원리로, 프레임 안에 들어 있는 단편적인 지식만 대중에게 전달하기 때문이다.
‘송곳니’는 단지 ‘의미 통제’의 원리뿐만 아니라 시각적 메커니즘에서도 관객을 타자화한다. 편집 방법을 보면, 숏 – 리버스 숏으로 3명의 대화를 봉합시키는 게 아니라, 한 명의 모습만을 보여주고 2명의 말소리는 외화면으로 처리함으로써, 영화가 관객의 시선을 스크린 안에 묶어 두려는 전략을 고의적으로 저버린다. 또 두 명의 인물이 있을 때 카메라는 한 명은 상체 아래로 몸을 잘라 프레임 안에 담는다. 이는 바라보는 관객에게 불편하고 찝찝한 느낌을 주기도 한다. 그뿐만 아니라, 집안의 벽면은 희고, 남매가 입고 있는 옷마저 희다. 그래서인지 입체적인 느낌을 주지 못하고 매우 평면적이다. 담장으로 가로막혀 있는 정원도 답답한 느낌을 준다. 영화는 관객의 시선을 한 곳에 묶어둘 소실점을 제공하지 않는다.
한편으로, 이 영화가 보여주는 ‘언어의 의미 통제’와 시각적 메커니즘은 관객에게 당혹스러움을 준다. 그것은 관객과 벌어지는 암묵적인 언어 규칙을 영화가 져버렸기 때문이다. 관객이 바라보는 담장 안 세계는 자신들이 속해 있는 세계와는 전혀 다른 세계다. 바다가 의자고 고속도로가 강풍, 도로여행이 바닥 소재, 노란 꽃이 좀비인 그들의 세계에서 관객은 철저히 타자의 입장에서 볼 수밖에 없다. 관객은 마치 이상한 나라에 도착한 엘리스처럼 어리둥절한 타자가 될 뿐이다. 또한, 영화는 관객을 봉합시키는 시각 메커니즘을 사용하지 않는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관객이 타자가 ‘된다’는 지점과 영화 ‘송곳니’ 사이의 연관 관계다. 오래전부터 영화는 이미 그 자체로 관객을 통제하는 권력의 메커니즘을 지니고 있다. 즉, 관객을 동화시키는가, 아니면 거리를 두게 할 것인가는 영화와 관객 사이에 존재하는 메커니즘이다. ‘송곳니’는 이러한 영화의 메커니즘을 이용해서 억압의 메커니즘이 타자화의 원리로 만들어진다는 것을 ‘언어 의미의 통제’와 ‘시각 메커니즘’이라는 형식으로 의미화한 것이다. 즉, 동화와 거리 두기라는 영화의 형식적 메커니즘을 통해 관객에게 권력의 타자화 원리를 체감하게 했다는 점이다. 이것은 영화가 주제를 전달하는 방식에서 단지 ‘보여주기’가 아니라 ‘체험하기’라는 입장에서 한 차원 더 깊은 주제 전달 방식이라는 점이다.
큰 언니가 경비원으로부터 록키와 죠스로 추측되는 비디오 영화를 보고 담장 밖 세계를 의식했을 때, 그 모습은 사실 우리 관객의 모습과 다르지 않다. 관객이 ‘송곳니’를 보고 타자화를 경험했듯이, 큰 언니 또한 비디오 영화를 보고 자신이 사는 이 담장 안 세계를 타자의 눈으로 바라보았기 때문이다. 큰 언니가 본 영화가 무엇인지 관객에게 알려주지 않은 것 또한 영화 속 담장 안 세계를 관객으로부터 절대적으로 타자화하려는 감독의 의도였을 터이다. 그것은 영화 속에서 유일하게 담장 밖을 인식하는 큰 언니와 스크린 밖 관객 사이에서 유기적인 시선 교환을 차단하는 효과를 가지고 온다. 관객은 오직 비디오 영화를 통해서 외부를 인식하게 되었다는 사실을 바탕으로 한 맥락에 의존할 뿐이다. 따라서 ‘송곳니’는 관객과 담장 안 세계가 영화라는 매체를 통해서 유기적으로 꼬리를 물며 서로를 타자화하는 자기 반영적 형태를 띠고 있는 것이다.
영화 초반부, 아버지는 아들에게 비디오 보기를 상으로 준다. 그 비디오는 자기 집 마당에서 노는 모습을 찍은 비디오다. 카메라는 삼 남매가 그 비디오를 관람하는 모습을 정면에서 촬영한다. 그것은 미디어를 통해 조작된 세계를 본다는 것과 인식하는 것에 대해 관객에게 조롱하는 듯하다. 옴짝달싹 못하고 스크린만 바라봐야 하는 영화관의 구속적인 시스템 속에서 허구의 영화를 보고 인식한다는 것이 사실상, 담장 안과 밖이 크게 다르지 않은 것이라고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