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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로케 May 28. 2020

연애, 예쁜 익숙함

남자들이 생각하는 이상형은 처음보는 여자다. 낮선 여자는 설레게 한다. 반대로 익숙함은 지루하다. 지루함은 권태를 부르고 권태는 이별을 부른다. 외모가 조금 떨어져도 처음 보는 여자는 1.5배 예뻐 보인다고 한다. 낮선 새로움이 말초신경을 자극하기 때문이란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 낮설었던 감각도 둔화되고 예뻐 보였던 외모도 평범하거나 못나 보인다. 옛 어른들은 이걸 꽁깍지가 벗겨졌다고 말한다. 생각해보자. 익숙함이 왜 권태를 부르고 이별까지 하게 할까? 익숙함은 편안함이다. 편안함은 부정 보다 긍정에 가까운 가치다. 하지만 편안함은 권태라는 부정적 가치까지 수반한다. 인생이 피곤해지는 순간이다.


우리는 침대 매트리스를 살 때 어떤 기준으로 살까? 직접 누워보면서 이 침대가 나에게 맞는 편안함과 안락함을 제공하는지 맞춰본다. 내 몸에 맞지 않고 불편하지만 매트리스가 예쁘다는 이유만으로 매트리스를 구매하지 않는다. 중요한 포인트는 나에게 딱 맞는 편안함을 제공하냐이다. 매트리스가 펀안하다고 권태감을 주는 건 아니다. 오히려 낮선 잠자리에서 더 잠을 자지 못한다. 낮설다는 것이 오히려 좋지 않은 경우다. 매트리스를 고르듯이 나의 반쪽을 선택한다면 어떨까?


이 세상의 연애관은 두 가지로 나누어진다. 첫번째는 감각성 연애와 두 번째는 기능성 연애다. 감각성 연애는 낮선 이성에서 오는 새로운 감각에 흥분해서 연애를 하는 경우다. 두 번째는 감각성 연애와 반대로, 매트리스가 주는 기능성 편안함처럼 익숙함에 취해 연애를 하는 경우다. 감각성 연애는 설레임의 강도가 초반에 높지만 오래가지 못한다는 단점이 있다. 기능성 연애는 편안하게 오래 연애할 수 있지만 설레임의 강도는 낮아진다는 단점이 있다.


나의 이성관은 감각성 연애에서 기능성 연애로 이동한 케이스다. 아내를 만나면서 부터다. 아내를 처음 봤을 때, 예쁘다는 생각을 안했다. 못난 건 아니지만 평범했다. 너무 평범해서 새로운 떨림이나 설레임이 없었다. 설레임이 없었는 데 연애에서 결혼까지 할 수 있었을까? 그건 아니다. 아내를 만나면 만날 수록 익숙함과 편안함이 나를 설레게 했다. 그게 말이 되냐고? 말이 된다. 이건 나에게 새로운 경험이었다. 그때 난 깨달았다. 편안함이 예쁠 수 있다는 걸. 익숙함과 편안함이 아내를 예쁘게 했다. 어쩌면 그게 내 아내의 매력인지도 모르겠다.


편안함이 수반하는 권태는 새로운 관점이 생기면서부터 깨진다. 익숙함을 권태가 아니라 예쁘게 볼 수 있는 관점이 생기면서다. 우리는 흔히 편안함을 예쁘게 보지 않는다. 편안함은 기능이지 미의 영역이 아니기 때문이다. 우리는 기능과 미를 분리해서 생각한다. 예를 들어, 여자친구가 내 사진을 찍어주는 모습은 기능이지만 난 그게 예쁘다. 1년, 2년 시간이 지나도 나의 멋진 모습을 찍어주는 여자친구의 기능은 흔들림 없이 나에게 예쁘게 다가온다. 편안함이라는 기능을 예쁘게 볼 수 있다면 그건 한없이 예쁘다.  


그렇게 보면, 우리의 연애관은 조금 더 업그레이드 할 수 있을 듯하다. 예쁨에 초점이 맞춰줘 있는 감각성 연애와 편안함에 맞춰진 기능성 연애관을 합치면 어떨까? 즉, 편안함이라는 기능이 예쁘고 아름답게 느껴질 수 있도록 취향을 개발하는 것이다. 시간이 지나고 오래될 수록, 그 편안함이 오히려 예쁘고 아름답게 받아들일 수 있다면 우리의 연애관은 조금 더 달라질 수 있을테니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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