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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로케 Jun 01. 2020

봉준호의 <마더>_ 심리적 율법의 파괴    

영화 ‘마더’는 혜자가 도준을 석방시키기 위해 진짜 범인을 찾는 여정을 그리고 있다. 혜자를 주체로 봤을 때, 이 서사 모델의 독특한 점은 대상과 수신자가 동일 인물이라는 사실이다.  이러한 서사 구조는 아버지를 죽인 원수를 찾으려는 오이디푸스가 결국 신탁으로 그 범인이 사실 자신이었음을 깨닫게 되는 오이디푸스 왕 이야기와 유사하다. 혜자의 목적은 범인(대상)을 찾아 도준(수신자)을 석방 시키는 것이다. 그런데 대상과 수신자의 일치는 혜자(주체)의 목적이 필연적으로 이루어질 수 없음을 뜻하므로 주체는 오이디푸스처럼 자멸하게 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발신자와 대상 그리고 수신자는 도준을 중심으로 돌고 도는 구조다. 도준이 아정을 죽임으로서 발신이 생기고 주체인 혜자는 그 사실을 모르고 대상(범인)을 찾아 도준을 석방하려고 하지만 그 범인이 도준이라는 것은 전통적인 필름 누아르에서 자주 선보이는 반전의 장치다. 그러므로 이 영화의 표면상에 나타나는 내러티브 방식은 그리 새로운 게 없다. 그러나 그 진부함을 독창적으로 변주하여 새로운 늬앙스를 만들어내는 봉준호의 연출력은 주목할 만하다. 즉, 익숙함을 낯설게 만들기 위해 봉준호가 서사의 맥락을 주무른 방식이나 연출이 어떻게 이루어졌는지가 이 영화를 분석하는 키워드가 될 것이다.


영화 마더는 스릴러 장르임에도 불구하고 시네마스코프 화면 비율을 사용하고 있다. 스릴러는 관객들에게 긴장감을 주기 위해서 넓은 화면 비율 보다는 좁은 화면 비율을 사용하여 관객이 영화에 몰입하게 한다. 그러나 봉준호는 시네마스코프 화면 비율로 프레임의 너비를 극대화했다. 그로인해, 봉준호는 이 영화에서 익스트림 롱샷을 효과적으로 사용했다. 익스트림 롱샷이 사용되는 지점은 혜자와 시골 마을 사이의 이질감을 표현할 때다. 사건이 일어나기 전까지 혜자에게 이 동네는 친숙한 동네였지만 도준이 살인혐의를 받고 도준의 누명을 벗기기 위해서  진짜 범인을 찾으려고 할 때, 혜자에게 친숙했던 이 공간은 어느새 적대적인 공간으로 변화한다. 진태는 혜자에게 말한다. “암튼 이 동네 자체가 이상해. 그러니까 엄마 아무도 믿지마. 다 필요 없고 나도 믿지마. 엄마가 직접 찾아 진짜 범인을” 


시네마스코프 비율의 화면


영화 오프닝 때부터 영화는 공간과 혜자 사이의 이질감을 강조한다. 허허벌판에서 우두커니 혼자 걸어와 춤을 추는 혜자의 모습은 다소 기이하다. 넋이 나간 표정으로 몸을 이리저리 흔드는 그녀의 모습은 슬퍼 보이기도 하면서 장난스러워 보이기도 한다. 혜자는 카메라를 응시하기도 하고 시선을 회피하기도 한다. 황량한 벌판 위에서 벌어지는 그녀의 춤과 알 수 없는 그녀의 표정은 이 영화가 보여주고자 하는 모습을 압축한다. 황량한 벌판 위에서 벌어지는 그녀의 춤은 자신의 죄책감을 해소하기 위한 일종의 주술적 의식행위를 연상하고 그녀의 표정은 자신의 복합적인 뒤틀린 욕망을 표현하고 있는 듯하다.


익스트림 롱샷이 혜자가 발 담고 있는 시골 공간을 강조했다면 클로즈업은 인물의 감정을 강조한다. 이 영화에서 빈번히 사용된 클로즈업은 정면과 측면이다. 두 사람이 대화를 할 때도 통상적인 영화 문법에 따라 정면 오버숄더 샷으로 샷을 봉합하지 않고 정면 혹은 측면 클로즈업만을 사용하여 대화의 샷을 봉합한다. 프레임 안에 있는 자질구레한 것들을 삭제하고 인물의 감정만으로 이야기의 긴장감을 전달하고자 하는 의도다. 특히 극이 점점 고조될 때는 이러한 클로즈업이 자주 사용된다. 시네마스코프에서 사용된 클로즈업은 인물의 모습을 화면 가득 안 채우면서 인물의 감정을 극대화하여 강조한다. 영화는 이러한 익스트림 롱샷과 인물 클로즈업을 번갈아 보여주면서 공간과 감정이라는 속성을 영화 속에 녹여낸다.  


인물 감정을 극대화하기 위한 클로즈업


마지막으로 이 영화에서 중요한 카메라는 바로 시점 샷이다. 시점 샷은 이 영화에서 서사를 이끄는 중요한 역할을 한다. 처음 도준이 아정이 뒤를 따라 갈 때 사용된 시점 샷과 마지막 백발노인 바라본 시점 샷은 하나의 사건을 두 가지 시점으로 바라본다. 엇갈리는 시점은 처음 영화 속에서 불충분 했던 정보의 퍼즐을 하나로 맞춘다. 백발노인은 폐가 안에서 아정과 도준을 바라보는 시점이고, 도준은 폐가 밖에서 아정의 후면을 바라보는 시점이다. 결국 이 영화는 시점 샷으로 시작해서 시점 샷으로 사건이 해결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누구의 시점으로 사건을 바라보느냐에 따라 엇갈린 진술은 관객들에게 명확하고 결정적인 증거로 사건을 해결시켜주지 않는다. 시점이라는 것은 주관적인 진술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 영화는 어찌 보면 닫힌 결말로 인식될지 몰라도 주관적 시점 샷으로 바라 본, 거기다가 아정과 성관계를 맺은 백발노인의 진술은 신뢰성이 떨어진다. 이 영화는 사건의 범인을 도준으로 지정하고 있지만 그 표현방법이 시점 샷이므로 객관적인 신뢰를 결여한다. 따라서 열린 결말로의 가능성도 함께 하고 있는 것이 바로 시점 샷 때문이다.


그 다음 이 영화에서 빈번하게 사용되는 샷은 인물의 카메라 응시다. 보통의 영화에서는 몰입을 방해한다는 이유로 카메라 바라보기는 금지되어 있지만, 마더에서는 자주 카메라를 바라보고 인물이 대사를 한다. 이 샷에서는 오히려 영화에 대한 몰입을 강화하는 결과를 낳았다. 그 이유는 이러한 카메라 응시가 인물간의 대화 속에서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진태는 카메라를 바라보고 이야기를 한다. 그 장면에서 관객은 진태가 혜자를 바라보고 있다는 것을 의식한다. 즉 카메라가 혜자가 되는 것이다. 여기서 나타나는 효과는 관객이 혜자의 입장되어 사건 속에 능동적으로 침투하게 한다. 감독은 카메라 시점의 사용으로 관객을 영화에 집중하게 한다.  


마더에서 묘사되는 시간은 현재와 과거다. 그러나 영화는 이 시차를 없앤다. 한 공간 안에 현재와 과거를 공존케 하는 연출은 긴장감을 끊지 않고 자연스럽게 극의 흐름을 이어가는 효과를 낳는다. 예를 들어서, 혜자가 미선의 사진관에서 포토샵 작업을 할 때, 미선은 문아정에 대한 기억을 떠올린다. 그러자 측면에서 강한 라이트가 들어오면서 순간 과거 여름시간대로 이행한다. 그리고 문아정이 사진관 안으로 들어온다. 그리고 문아정이 핸드폰 안에 있는 사진을 인화할 수 있냐고 묻는다. 문아정이 코피를 흘리자 다시 시간은 현재로 돌아온다. 관객에게 보여지는 미선의 회상이 혜자에게 들려주는 이야기임을 암시하는 미선의 대사가 나타난다.“그래 그때 코피 흘리던 애가 문아정 게였어.” 영화는 사건의 흐름을 끊는 부자연스러운 플랙쉬 백 보다는 한 공간에서 시차만을 변화시켜 영화의 리듬을 이어간다.


시차를 뛰어넘는 편집


숏과 숏의 연결은 롱숏 → 미디움 숏 → 클로즈업으로 이어지는 연결 편집이 아니라, 익스트림 롱숏 → 클로즈업 혹은 반대로 클로즈업 → 익스트림 롱숏으로 이어지는 극단적인 편집을 보여준다. 이는 앞에서 말한 것처럼, 이 영화가 강조하는 공간의 서사와 혜자라는 인물의 감정 사이에 있는 극단적인 대립을 강조하기 위해서이기도 하고 인물, 사건, 공간이 유기적인 관계를 띄고 있음을 나타낸다. 예를 들어, 혜자가 진태 집에서 골프채를 발견하고 강둑을 걷는 장면에서 먼저 골프채를 클로즈업하고 그 다음에는 혜자의 얼굴을 클로즈업한다. 그리고 강둑을 걷고 있는 혜자의 모습을 익스트림 롱샷으로 이어 보여주는 장면이 바로 그러하다.


봉준호 감독의 영화에는 사회 시스템에 대한 비관적인 견해가 숨어있다. 그의 영화 속에는 불합리하고 우스꽝스러운 사회구조적 관습을 풍자하는 묘사들이 자주 나타난다. 살인의 추억과 괴물이 바로 그러하다. 봉준호가 이 두 영화에서 사회의 위선적인 구조와 의식들을 직접적으로 풍자했다면 마더에서는 그 양상이 매우 다르다. 마더는 전작에서 보여준 직접적인 화법으로 이 사회의 허울을 폭로하기보다, 인간 안에 내재된 뒤틀린 심리적 구조를 들추어 파괴한다. 즉, 전작에서 봉준호가 주체(인물) 외부에 존재하는 객체(사회 구조)를 풍자했다면 마더에서는 주체 내부에 있는 심리적 율법(심리적 구조)의 파괴 양상을 그리고 있다는 점이다.


먼저 마더는 기존의 오이디푸스 영화와 달리 오이디푸스를 바라보는 시점이 자식의 입장이 아니라 엄마의 입장이다. 즉 자식의 욕망이 아니라 엄마의 욕망을 담아내고 있는 것이다. 이 영화는 엄마의 욕망이 어떻게 쇠락하는지를 보여주고 있다. 


일단, 이 영화 속에서 혜자는 공권력을 초월한 단독자다. 경찰에 의지하지 않고 혼자 범인을 찾겠다는 그녀의 행동에서, 이 사회의 공적 체계를 비관하는 봉준호의 의식이 일차적으로 잘 나타난다. 그러나  근본적으로 더 들어갔을 때, 이 영화는 아들을 지키겠다는 혜자의 욕망이 광적인 히스테리로 뒤틀리는 과정을 그리고 있으며 급기야, 그녀는 고물상 백발노인을 살해하기까지에 이른다. 이 과정 속에서 그녀의 욕망은 이 사회의 윤리적 초자아를 파괴한다.


히스테리컬하게 뒤틀리는 혜자의 욕망


엄마와 아들이라는 공적 계약으로 맺어진 사회적 관계가 이 사회의 윤리적 의식을 파괴한다는 서사 설정이 매우 의미심장하다. 다시 말해, 엄마와 아들이라는 공적관계로 말미암아 생긴 한 개인의 내밀한 욕망이 다시 이 사회의 공적 의식을 파괴한다는 것은, 이 사회체계의 근원적인 아이러니함을 폭로하는 서술이다. 이는 봉준호가 전작에서 피상적으로 비판한 이 사회의 시스템과는 전혀 다른 깊이를 지니고 있다. 즉, 한 개인의 욕망과 사회라는 상호적인 변증법 속에서 이 사회 시스템이 얼마나 부실한 허울 위에 놓여있는 허상인지를 폭로하는 것이다.


더 나아가, 마더 속 시골마을은 성적 파토스로 넘쳐나는 공간이다. 하나의 공적 공간 안에 내재된 개인 간의 성적 네트워크는 진태가 말하듯이 동네 자체를 이상하게 만든다. 예를 들어 도준과 혜자, 맨하탄 주인 여자와 진태 그리고 맨하탄 딸과 진태, 도준과 미선, 문아정과 동네 수많은 남자들 등, 영화 속에는 성적 욕망을 암시하는 관계들로 넘쳐난다. 정상적인 시골 공간처럼 보이지만 그 안에는 성적 파토스로 가득 찬 비정상적인 징후들이 넘쳐난다. 이러한 개인 간의 욕망 사이에, 제문으로 상징되는 공권력 즉 초자아는 무기력하다. 따라서 영화는 인간의 무의식과 의식의 틀을 뛰어넘어, 시골마을로 표상되는 공간의 의식과 무의식의 경계를 넘나들고 있기도 하다.


성적 파토스로 넘쳐나는 시골 공간


<플란다스의 개>, <살인의 추억>, <괴물> 그리고 <마더>를 관통하는 봉준호의 일관된 코드는 익숙한 공간을 낯설게 만드는 그의 전술이다. <플란다스의 개>에서는 아파트 지하실을, <살인의 추억>에서는 화성을, <괴물>에서는 한강을, 그리고 <마더>에서는 조그마한 시골마을을 낯설게 했다. 마치 봉준호는 익숙한 미시 공간 속에 우리들이 미처 의식하지 못한 사이에 침투한 거대 병적 징후들이 얼마나 무섭게 도사리고 있는지를 강조하려는 듯하다. 한마디로 말해, ‘아주 무서운 바이러스가 니가 살고 있는 바로 그곳에서 너의 의식을 갉아 먹고 있다’라고. 마더는 도시가 아닌 시골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도시에서의 살인 사건은 별반 새로울 게 없지만 조그마한 시골 마을에서의 살인은 뭔가 충격적이다. 반장은 말한다. “그나저나, 우리 살인사건이 얼마만이여?‘


의식하지 못한채 침투한 병적 징후


도시는 풍요로움이 넘쳐흐르는 공간인 반면에, 시골은 궁핍하다. 도시는 부족해서 욕망하는 게 아니라, 타인의 시선에 의한 욕망이다. 자기 애인도 충분히 예쁘지만, 자기보다 더 아름다운 애인을 둔 친구를 보면, 그보다 더 멋진 여자를 만나고 싶어 한다. 혜자의 시골 마을은 어떤가? 그곳의 사람들은 궁핍해서 욕망한다. 돈 대신 쌀 받고 떡친다는 쌀떡소녀 문아정은 돈이 아니라, 생계를 위해 필요한 쌀을 받고 관계를 가진다. 더도 말고 덜도 말고 살기 위해 쌀을 달라는 것이다. 중앙의 도시와 변두리 시골 마을 사이의 생리는 이토록 간극이 크다.


첫 시컨스에서 벤츠 끌고 도준이를 뺑소니치고 골프장으로 간 교수 일행들을 보면 도시와 시골 사이 간극이 잘 드러난다. 교수 일행은 도준과 진태를 자해 공갈단으로 생각하고 그냥 갔다. 그들의 눈에 비치는 시골 사람들은 돈 없어서 몸으로 때우는 천박한 인간 군상이다. 


그런데 이 영화의 결말을 보면 결국 이러한 도시와 시골 사이의 간극을 좁히지 못하고 자폭한다. 다시 말해, 도시인에 대한 복수로 이 영화가 끝나는 것이 아니라 종팔이라는 또 다른 소외 받는 자로 죄가 돌아가는 것이다. 

그러므로 마더는 시골, 장애인, 생계형 원조교제와 같이 소외 공간, 소외계층이 서로를 파괴하는 형국을 그리면서 우리 사회 속에 얼마나 깊숙이 많은 바이러스가 침투했는가를 강조한다. 즉, 바이러스가 부패한 상위 계층에 의해서 만들어져 내려오는 게 아니라, 하위 계층에서도 스스로를 파괴하는 욕망을 만들어 낸다는 뜻이다. 그래서 마더는 우리에게 경각심을 준다. 임상수 감독이 돈에 눈먼 상위 1%의 상위 계층에게 독설의 칼날을 날리며 99%인 우리를 구경꾼으로 만들었다면, 봉준호는 99%인 우리 안에 있는 일상적인 욕망이 얼마나 무서운 결과를 낳아 우리를 죽이는지를 보여준다.


소외계층이 서로를 파괴하는 형국


이 영화는 도준을 지키겠다는 혜자의 지극히 일상적인 모성애의 욕망이 한 순간에 뒤틀리면서 혜자를 파괴했다. 혜자가 잡겠다는 것이 결국 자기 파멸로 몰아간다는 필름 누아르의 서사 구조는 결국 이 사회의 부조리한 구조와 동일한 선상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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