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론가가 아닌 행위 예술가처럼 살아야 한다. 작품에 의미를 부여하는 평론가적인 태도로 삶을 살면 인생은 자폐증에 빠진다. 평론가는 작품을 해석하고 거기에 의미를 부여한다. 그들은 의미를 생산하지 않고 자의적인 해석을 작품에 부여한다. 그런 사람들은 하루종일 먹고 싸고 자고만을 반복하는 삶속에서도 의미를 찾는데는 도가 텄다. 이건 삶이 발산되지 않고 안으로 수렴되는 꼴이라서 에너지가 역동적으로 만들어지지 않는다.
역동적인 삶을 위해서는 효과에 주목해야 한다. 효과는 의미를 창조하기 때문이다. 효과는 행위의 결과다. 예를 들어,우린 다이어트 하는 친구에게 그 운동법이 효과 있냐 고 묻는다. 이때 효과는 살이 빠진다는 결과다. 살이 빠졌다면 그건 의미가 있다. 행위가 낳은 효과가 의미를 창조한거다. 하지만 운동하지 않고 불룩 튀어나온 뱃살을 보며 야근과 잦은 회식으로 쌓은 훈장이라는 의미를 부여하는 순간 자폐증 환자가 되는거다.
행위 예술가는 의미를 찾거나 부여하지 않고 창조한다. 행위의 결과가 만든 효과가 의미 일 수 있도록 한다. 머리를 쓰며 의미를 부여하지 않는다. 감각적이고 직관적인 의미를 생산한다.잭슨폴록이 물감을 튀기며 만든 액션 페인팅 작품의 결과만 보고 온갓 해석을 떠들어대는 평론가들의 말은 소설이다. 하지만 잭슨플록은 그 행위 예술을 하며 본인에게 그것이 어떤 감각의 의미로 왔는지 안다. 행위를 통해 의미를 스스로 창조한거다.
의미는 행위의 효과로 만들어진다. 의미부여를 한다는 건 행동하지 않았다는 거다. 부여라는 말은 인위적으로 주입했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행위를 했다면 의미는 저절로 만들어진다. 인위적으로 의미부여를 한다는 건 유의미한 행위를 하지 않은거나 다름없다.
아무런 행위를 하지 않고 의미부여만 하면서 평론가적인 태도로 삶을 사는 사람들이 있다. 그런 사람들은 네모난 모양을 유지한채 매일 색깔만 바꾸면서 사는 거와 같다. 동그라미, 삼각형, 마름모 등 모양을 바꾸는 행위를 통해서 그게 자신의 삶에서 어떤 효과가 나타나며 그게 어떤 의미가 되는지 도전조차 하지 않는 삶이다. 모양만 유지하고 겉포장만 바꾼다면 에너지는 발산되지 않고 고여서 썩게 된다. 스스로가 부여한 의미는 무의미하다. 행위의 효과로 생산된 의미만이 유의미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