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물 Natura Mota, 1952
리추얼 Ritual
리추얼의 사전적 의미는 [항상 규칙적으로 행하는 의식과 같은 일]이다.
삶에서 맞닥뜨릴 여러 일들을 지혜롭게 잘 해결하고 헤쳐나갈 수 있도록 나만의 리추얼을 만들어 놓고 싶었다.
몸과 마음이 힘들 때에도 나를 일으켜 세워줄 무언가가 필요하다 생각했다.
가족이 잠들어 있는 이른 아침, 제일 먼저 나를 위한 따뜻한 차를 내린다.
쪼르르 찻 물이 내려지는 맑은 소리가 나를 깨운다.
자리에 앉아 일기를 펴고 지난 하루 속 감사한 일들을 떠올려 본다. 그리고 진심으로 감사한다.
아침 기도를 드리고 나의 마음을 조금 더 깊고, 넓게 만들어 줄 책을 꺼내어 읽는다.
내면을 채우는 이 시간은 나에게 참으로 필요했던 힐링과 위안의 시간이 되어주고 있다.
2022년의 시작.
나에게 한 해의 시작인 1월은 긴 겨울 방학의 시작이기도 하다.
홀로 사색하는 시간에 에너지를 충전하는 나라는 사람에게는 지금 이 시간이 그리 녹록하지 만은 않은 것이다.
지난 2년간 코로나로 여러 번의 위기도 어떻게든 잘 넘기고 버텼기에 제법 담담하게 맞이한 방학이었다.
방어책으로 나만의 시간을 위한 리추얼을 지키고 있었고 그 시간은 긴 겨울방학을 보내는 버팀목이 되어 줄거라 확신했다.
문제는 리추얼 이후의 시간이었다.
또다시 하루는 나를 돌아보고 생각할 틈 없이 빠르게 흘러갔다.
기본적으로 먹고 치우는 시간을 제외하고 아이가 학원에 가있는 1시간 반 남짓한 시간이 오롯이 나에게 주어진 시간이다.
귀하디 귀한 그 시간을 그림을 그리고 글도 쓰며 치열하게 보내야 함이 맞는데 그게 잘 안되더라.
에너지가 고갈된 나는 그림을 매만지기만 할 뿐 집중할 수 없었다.
머릿속을 꽉 채운 많은 것들 속에서 나는 빙빙 돌고 있었고 그런 나를 바라보는 건 참 힘 빠지는 일이었다.
머리가 가벼워야 몸이 움직인다고 했는데 나의 머리는 지금 너무 무겁다.
여기저기로 뻗어나간 나의 에너지를 가슴 한 곳으로 모으는 일이 왜 이리 어렵나.
간결한 삶과 그림, 조르지오 모란디
이탈리아 볼로냐에서 태어나 그곳에서 생을 마감한 화가, 조르지오 모란디.
특별한 미술 사조라 정해짐이 없는 그의 그림은 섬세하고 미묘한 절제된 마음 울림을 준다.
모란디만의 차분하고 균형 잡힌 그림, 그 속에 묻어나는 외로운 듯 따스한 색감이 참 좋았다.
그의 그림을 그리며 그의 삶을 들여다 본 나는, 그의 삶과 정신이 그림 속에 그대로 담긴 것임을 알게 되었다.
모란디는 결혼도 하지 않고 세평 남짓한 작은 방에서 자신이 마련한 소박한 정물들을 그리며 평생을 보냈다.
새로운 자극이나 아이디어를 찾아 여행을 가거나 사람들과 교류하는 많은 화가들과는 달리 자신의 작업이 흔들림 없도록 홀로 그림을 그렸다고 한다.
벼룩시장에서 병과 그릇들을 사다 페인트 칠을 해서 개별적인 특성을 제거시키고 난 뒤 그 물체들에 세월의 먼지가 쌓이도록 그대로 두었다고 한다.
사과라는 본질을 찾아내려 눈으로 볼 수 있는 모든 각도에서 바라보고 또 바라본 폴 세잔처럼, 그도 그 물체가 가진 그만의 본질을 찾고자 바라보고 또 바라보며 그림을 그렸다.
일상의 소재인 지극히 평범한 물체들을 구성과 배열을 바꾸어가며 수없이 반복해서 그린 그의 정물화.
가시적 세계에서 내가 유일하게 흥미를 느끼는 것은 공간, 빛, 색, 형태이다.
_조르지오 모란디
세월의 공기가 내려앉고 켜켜이 먼지가 쌓인 그 모든 시간이 담긴 그림.
고요하고 적막하지만 지나온 시간의 깊이를 느끼게 해주는 그의 그림은, 과함이 없고 차분하며 담담한 세월의 흐름 속 따스함을 전해준다.
그림을 그리며 색을 얹으며 그가 남긴 붓터치를 따라가 본다.
하나하나 쌓아 올린 그 붓질에는 자신의 앞에 있는 물체에 쌓인 시간과 공간의 흔적이 함께 담겨 있음을 생각한다.
남들이 보기에는 적막하고 부족해 보였을 그의 삶.
하지만 자신의 내면에 집중한 삶을 살았던 그의 마음에는 부족함이 없지 않았을까?
그림과 같이 절제된 삶이었지만 자신의 에너지를 한곳에 집중했던 그 자신은 풍요로웠으리라 생각해 본다.
나의 삶, 나의 하루, 나의 에너지
내가 살아가고 싶은 삶을 생각해 본다.
내가 소중하게 생각하는 가치를 생각해 본다.
내가 집중하고 싶은 일을 생각해 본다.
이곳에 나의 마음과 시선이 머물게 하며 그 외의 것들은 조금 멀리 흘려보내고 나에게 주어진 하루에 집중한다면,
단순하지만 지루하지 않고.
꽉 찼지만 허전하지 않으며.
의미 있는 하루를 보냈음에 미소 지을 수 있지 않을까?
에너지를 한 곳에 모아 나에게 가치 있는 것에 집중하는 단순하지만 꽉 찬, 의미 있는 삶.
그게 내가 바라는 삶이리라.
오늘도 그림으로 '나를 돌아보고 나를 만나는 나'는 그 길로 한걸음 걸어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