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의 루틴 / 아무튼 노래 / 위저드 베이커리
매 순간이 새로워야 하는 건 아니다. 새롭게 느끼는 일이 중요하다. (이규리, p107)
마지막 최지은 시인의 글이 가장 인상 깊었다.
제가 아득하게 바라보고 있는 바다는 '쓰기의 세계'입니다. 이 바다는 아름답습니다. 시원하고 깨끗하고 광활합니다. 문제는 제가 물에 익숙하지 않다는 것, 수영을 할 줄 모른다는 것, 바라만 보고 있기에는 바다를 너무 좋아하게 되어 버렸다는 것이겠죠.
재능을 생각하면 심란해지기 쉽지만, 재능이란 좋아하는 마음에서 시작한다는 믿음을 갖고 있습니다. 좋아하지 않으면 잘 할 수 없고, 좋아하지 않으면 지속할 수 없고, 좋아하지 않으면 재능을 판별할 기회도 줄고요. 무엇보다 좋아하지 않으면 재능 앞에 괴로울 일도 없을 거예요. 좋아하는 마음은 단순하고 깨끗합니다. 여기에 다른 것들이 끼어들 때 조금 복잡해지는 것 같아요. -p170
두려움은 욕심에서 기인하는 것 같아요.
단번에 내가 원하는 세계에 닿고 싶은 욕심. 성취하고 싶은 욕심. 타인에게 상처 주고 싶지 않은 욕심. 매번 잘하고 싶은 욕심.
상한 잎을 떼어 내듯이 욕심을 살짝 덜어 내면, 오직 시를 쓰고 싶은 마음, '이것을 쓰고 싶다'의 충동은 강렬하고 깨끗합니다. 이 충동은 진심과 맞닿아 있는 것 같고요. -p183~184
슬픔이 가장 편한 선택이 될 때가 있었습니다. 슬퍼하는 것만이 해야 할 일이라는 듯, 깊어지는 고통이 오히려 편안할 만큼. 익숙하게 울고 익숙하게 아파하고 익숙하게 바라보면 되었으니까요. 그런데 시는 익숙한 것에서 약간 벗어나는 것 같아요. 조금은 다르게 생각하고, 무엇이든 조금 바꿔도 보고, 시간을 빠르게 돌리고 혹은 시간을 멈춰 세울 수 있는 용기까지 시는 갖고 있어요. 눈송이를 멈춰 세우듯이 제 마음을 멈춰 세우고 응시하는 시간이 한동안의 저의 시 쓰기였던 것 같습니다. 그 속에서 듣고 싶은 말이 들릴 때까지 헤매고 싶었던 것 같아요. 시 밖으로 나왔을 때 잘 살아갈 수 있는 힘이 되는 마음을 얻고 싶었던 것 같아요. -p185
무엇보다 인간은 라벨링으로 굳어지고 고정될 수 없는 존재라는 것을 깨닫습니다. 계속해서 변화하고 흔들리는 존재라는 것을. 이런 것을 쓰고 싶다고 생각합니다. 가능한 한 깨끗한 마음으로요. 익숙한 슬픔을 다른 이름으로 저장하면서, 다른 이름을 붙여 주면서, 자꾸 달라지는 나를 기록해 가면 좋겠어요. -p187~188
"틈을 주라는 거예요. 틈."
'틈'이라는 말이 낯설게 들렸습니다. 숨이 트이고 호흡이 편안해지고, 차갑고 깨끗한 물이 흐르고, 기분 좋은 바람이 불 것 같은 말이었습니다. 틈이라는 말.
선생님의 처방처럼 시를 쓰며 30분마다 휴식을 취하지는 못하지만, 먹어야 할 때 밥을 먹고 자야 할 때 잠을 자고 사이사이 깨끗한 공기를 마시는 일을 미루지 않기 위해 노력하게 되었습니다.
계속 쓰고 싶으니까요. -p189
그러나 산문적 자아를 임진강에 풍덩 빠뜨린 뒤 미련 없이 돌아오고 싶을 때가 있다. 그럴 때 노래를 만든다. 지금까지 다섯 곡을 만들었는데 그중 아무것도 히트를 칠 것 같지는 않지만 나는 노래 만드는 일을 좋아하는 것 같다. 가장 잘하고 싶은 일이 아니어서다. 그런 일은 자유를 준다. 즐거울 수 있는 만큼만 매달릴 자유 말이다. 글을 쓸 때는 그런 자유가 따르지 않는다.
잘하지 않아도 된다는 자유와 함께 글쓰기에서 노래 만들기로 도망을 친다. 도망쳐서 만든 노래가 많이 쌓인다면 소곡집을 만들 것이다. 언젠가 이문세처럼 두 번째 서른 살이 된다면 지금으로선 상상할 수 없는 곡들을 써놨을지도 모른다. 그중 하나쯤은 히트곡일 수도 있다. 그렇다면 꼭 들려줄 것이다. 장복희와 홍은표와 김옥심에게, 요조에게, 짓궂은 친구들에게. 부끄러움 없이 떼창도 시킬 것이다. 그리하여 한겨울에도 추위를 모르게 할 것이다. 그들이 원하는 시절로 순간 이동도 시킬 것이다. -pp63~64
우리는 태어나면서부터 그 노인의 세계에 속했다. 근육질의 할아버지가 덮어씌운 사랑의 보자기. 그 안은 정도 많고 실수도 많은 세계였다. 한집에서 자란 우리는 커서 서로 다른 가족 드라마를 쓴다. -p112
우리는 서로가 얼마나 모르는지 강조하며 웃는다. 몰라도 괜찮다는 듯이 웃는다. 나는 그 순간이 "넌 내 마음 다 알잖아." 같은 말을 주고받을 때보다 더 좋다. 그냥 우연히 남매가 되었을 뿐이다. 가족이어도 다 알 수가 없다. 모른다는 것을 알아야만 한다. 그는 나랑 너무 닮은 미지의 타인이다. 모르면서도 너무 애틋한 타인이다. -p117
이 노래를 들으면 내 마음에 함박눈이 펑펑 내린다. ...(중략)... 노래가 흐르는 동안 내 마음엔 흰 벌판이 생긴다. 벌판이 크고 고요해서 내 마음은 넓어지고 깊어진다. 그 벌판에서 나는 누구를 기다린다. 잠깐 기다린 게 아니고 오래 기다린 것 같다. 재촉하지도 나무라지도 않고 말이다. 벌판의 끝에는 나의 집이 있다. 작고 오래되었지만 따뜻한 집이다. 그곳을 치우고 데우며 기다린다. 먼 길을 걸어왔을 누군가를.
이것은 정미조가 내 마음에 만든 풍경이다. 정미조의 노래는 나를 위한 흰 벌판을 통째로 가져다준다. 노래를 탁월하게 잘하는 사람들은 무수하지만 듣는 이에게 이토록 커다란 공간을 주며 노래하는 사람은 함박눈만큼이나 드물다. 드물긴 해도 타인이 들어올 자리를 넉넉히 내어주는 곡들이 세상에는 있다. 나는 그런 노래에 마련된 공간에 가서 울고 걷고 쉰다. -pp139~140
*이슬아 작가가 왜 이렇게 인기가 많은지 단번에 알겠다. 일단 레퍼토리가 다양하다. 그래서 에세이집이 지루하지 않다. 하나의 주제로도 다양한 얘기를 끌어오고, 그걸 풀어내는 방식과 문체도 다채롭다. 작가 본인의 무기가 많으니까 가능한 일.. 그리고 글을 읽다 보면 왠지 귀엽고 웃긴 구석이 있다. 그러면서도 간간히 문학적인 감동을 준다. 제목도 잘 짓는다. 맨 처음 메일링 서비스할 때 구독했었는데, 그때만 해도 1일 1수필을 매일 썼으니.. 타고남 + 성실함 + 무한한 연습이 지금의 이슬아 작가를 만든 것 같다.
*<비문학적 노래방>과 <세월과 노래>는 통째로 필사했다. 문장도 문장이지만 구성 자체에 배울 점이 많다.
가슴에 금이 갔다. 그 금이 벌어지더니 습하고 불쾌한 공기가 그 사이로 지나갔다. 물길이 눈으로 열렸다. -p75
*주인공이 처음 우는 장면을 묘사한 문장. 멋진 표현이다.
무엇보다도 사람의 감정은 어째서, 뜨거운 물에 닿은 소금처럼 녹아 사라질 수 없는 걸까. ...(중략)... 그러다 문득 소금이란 다만 녹을 뿐 사라지지는 않는다는 걸 깨닫는다. 어떤 강제와 분리가 없다면 언제고 언제까지고 그 안에서. -p185
*나 어렸을 때부터 청소년문학 베스트셀러로 학교 도서관에 늘 있었는데 이제야 완독했다. 아파서 하루 종일 누워있을 수밖에 없었던 오늘, 침대에서 단숨에 끝까지 읽었다. 흡입력이 끝내준다,,
*묘하게 하울의 움직이는 성이 떠오른다.. 하울-캘시퍼-소피가 점장-파랑새-주인공과 연결된다.
*그런데 청소년문학이라기엔 꽤 잔인하고 폭력적이라 아이들에게 추천하고 싶진 않다. (스포주의) 특히 성범죄 장면은 어른인 나도 읽기 힘들었다ㅜ 구병모 작가의 <피그말리온 아이들>도 아동학대를 다루는 소설이었는데 내가 이런 장르와 안 맞는 듯. 잔상이 오래 남고 괴롭다.. 파과도 못 읽겠음.. <어느 피씨주의자의 종생기>는 정말 재밌게 읽었다. 생각할 거리도 많고, 구병모 작가의 매력이 뚜렷하게 드러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