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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 속 서유미 작가님 글에 반해버린 나는 동네 도서관에서 작가님 소설 두 권을 빌렸다. 장편, 단편 하나씩 가져왔는데 단편집을 읽고 나니 벌써 반납 기한이 됐다.. 장편은 다음 기회에,,
<이 밤은 괜찮아, 내일은 모르겠지만>은 작가 서문과 7편의 단편 소설, 5편의 짧은 소설 그리고 백수린 작가님의 추천 글로 구성되어 있다. 그중 인상 깊었던 문장을 나누고자 한다. 서평이라기보단.. 호들갑에 가까운 감상 글이다. 가볍게 읽어주시길!
오전인데도 카페 1층에는 빈자리가 눈에 보이지 않았고 플라스틱 총을 멘 사람들이 삼삼오오 모여 있었다. 총은 알록달록했고 사람들은 피 대신 물을 뚝뚝 흘렸다. 여자는 그들을 의아하게 쳐다보며 2층으로 올라갔다. 창가에 앉자 '00 물총 축제'라고 쓰여 있는 플래카드가 햇빛 아래 가볍게 흔들렸다. 거리 안쪽에 튜브로 만든 조형물과 행사 부스들이 길게 늘어서 있었다. 물총을 멘 사람들이 장난을 치며 그곳으로 몰려갔다. 누군가 전쟁이다 하고 소리를 질렀다.
전쟁은 언제나 아이의 발열로부터 시작되었다. 아이가 먹지도 자지도 않고 뜨끈하게 달아오른 몸으로 칭얼대면 여자와 남편은 비상사태에 돌입했다. 작은 독재자의 짜증과 투정에 집안에는 긴장감과 전운이 감돌았다. -p18
- 오랜만에 친구와 만나러 나온 아기 엄마, 약속 장소에서는 물총 축제가 한창이다. 전쟁이다! 하고 누군가 장난스레 던진 말은 주인공 부부의 진짜 전쟁 장면으로 이어진다. 이렇게 시작하는 게 영화 같기도 하고, 작가님의 천재성에 감탄이 나온다.
두 사람은 같은 편일 때는 교신을 주고받으며 잘 헤쳐 나가다가 자기 진영으로 돌아가면 사소한 일에 기분이 상해서 서로에게 총구를 겨누었다. 그 순간에는 아이가 아프다는 걸 잊고 아이가 누워서 쳐다본다는 것도 지운 채 언제든 발사할 수 있다는 사실만 상대에게 반복해서 말했다. 상대가 총을 내려놓으며 싸울 뜻이 없음을 밝히면 감정을 추스르려 애쓰지만 대치 상태가 이어지면 누군가 참지 못하고 방아쇠를 당겼다.
날카롭고 화력이 센 말은 결혼을 부정하고 사랑을 저주하고 서로의 존재를 찢어 버렸다. 그렇게 한바탕 총탄을 갈겨 대고 나면 승자도 패자도 없이 기진해진 채로 주저앉아 피를 줄줄 흘렸다. 전쟁의 끝이 매번 그러했다는 걸 알면서도 같은 실수를 저질렀다. -p19~20
- 부부 싸움을 이렇게 고급지게 묘사할 수 있어요? 물총 축제의 '총'을 그대로 부부 싸움에 가져온다. 부부는 사소한 일로 시작해 서로 총구를 겨누고, 상대가 총을 내려놓으면 바로 진정하지만, 그렇지 않으면 방아쇠를 당겨버린다. 하이퍼리얼리즘 그 자체다.. 유부녀로서 공감 백배.. 나는 아직 아이가 없어서 그런지 부부 싸움을 별로 안 하는데 주변으로부터 육아를 하면 몸도 마음도 너무 지쳐서 자주 싸우게 된다는 말을 많이 들었다. 서유미 작가님도 아이를 키우시다 보니 경험에서 우러나와 이런 소설을 쓰신 것 같다.
결국 애 때문에 예민해져서 남편이랑 한바탕 하고 둘 다 얻는 것도 없이 후회한다는 말인데, 맘카페에서도 흔히 볼 수 있는 당연한 일상인데, 이걸 이렇게 시적으로 고급스럽게 표현하는 게 바로 문학의 매력인 것 같다. 작가라는 직업이 대단한 이유고!
'총', '전쟁'이 두 가지 의미로 쓰이고 소설 제목인 '거리'도 약속 장소인 길거리와 남편과 나 사이의 거리라는 중의적 의미를 갖는다.
Restaurant Sailing. 블랙과 화이트의 모던한 간판을 따라 들어가면 나무 계단이 나오고 그 아래 진한 고동색 나무 문이 나타났다.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을 때 펼쳐지던 레스토랑의 전경이 지금도 눈에 서하다. 기다란 직사각형 형태의 어둑한 실내와 붉은색과 검은색, 흰색이 섞인 테이블보가 덮인 열 개의 테이블. 그 위에 놓인 소금과 후추를 담은 은색 양념통과 찌그러진 양철 재떨이. 왼쪽에 체크무늬 커튼으로 가려 놓은 주방까지. -p32
- 양식 레스토랑에서 아르바이트하던 네 명의 청춘이 있다. 젊은 여자 둘, 남자 둘이 모였으니 술도 마시고 사랑도 하다가 멀어진다. 주인공은 여자 동료와 꾸준히 친하게 지내며 16년 간 서로의 생일을 챙긴다. 둘은 만날 때마다 아르바이트했던 과거를 얘기하며 추억을 떠올린다.
위의 단락은 소설의 주된 배경인 레스토랑을 묘사한 장면이다. 역시 소설은 설명하기보다 보여주기의 장르다. 레스토랑이 어땠을지 눈에 선명하게 그려진다. 대충 캔모아 아니면 한스델리 느낌이겠지. 그리고 이름이 '세일링'인데 이게 계속 활용된다.
어떤 것을 좋아하게 될 때 전체가 마음에 드는 경우도 있지만 한 부분에 마음을 빼앗길 때가 있다. 나는 올드 팝과 시네마 천국이 만드는 세일링의 분위기가 좋았다. 배를 타 본 적은 없지만 커다란 배 안에 있는 것 같았고 지하에 있는 레스토랑이 어딘가를 향해 나아가는 것 같았다. 정신없이 주문을 받고 음식을 나를 때는 인식하지 못하다가 손님들이 돌아가고 테이블에 가만히 앉아 벽을 보고 있을 때면 나무로 만든 배를 타고 낯선 바다를 떠도는 듯한 감각이 온몸에 퍼졌다. -p33
우리 넷은 동갑이라는 것 외에는 공통점이 없었다. 출신 학교와 전공, 사는 동네, 아르바이트를 하게 된 계기나 이유도 제각각이었다. 이 레스토랑에 머물고 있지만 언젠가 다른 곳으로 가야 한다는 걸 알았고 어디로 가야 할지 몰라 막막한 상태로 정박 중이었다. 바깥세상은 망망대해처럼 넓고 가능성이 많아 오히려 길이 보이지 않았고 세일링의 홀 서빙은 직업이 될 수 없었다. -p42
- 작가는 청춘 네 명이 레스토랑에서 아르바이트하며 보낸 시절을 항해에 비유한다. 레스토랑 이름을 '세일링'으로 설정한 이유도 여기서 드러난다. 젊음을 항해와 연결지은 부분이 나올 때마다 흥미로웠다. 흔한 스토리에 특색을 생기는 건 바로 이런 디테일한 설정과 묘사 때문이다.
그것만 찾을 수 있다면 다른 건 다 없어져도 괜찮다는 마음이었는데 그게 바닷속에 완전히 잠겨 버렸다. 새벽에 가방을 뺏겼을 뿐이지만 나는 풍랑을 만나 배가 다 부서진 것처럼 바다에 깊이 빠져버렸다. 집에 돌아왔는데도 널빤지 하나에 의지해 바다 위에 겨우 떠 있는 것 같았다. -p8
- 여기도 마찬가지. 가방 잃어버린 걸 표류에 비유했다. 주인공이 선물 받은 귀걸이가 푸른색인 것도 같은 이유일까? 이런 걸 찾는 재미가 있다.
은석이 문을 열다 말고 은주를 쳐다봤다. 은주는 그 눈동자를 보지 않으려고 고개를 숙였다. 성인이 된 뒤 두 사람은 서로에게 뭔가를 부탁하거나 신세 지지 않으려고 애썼다. 같이 잡히는 불행을 피하기 위해 여러 개의 말이 분주히 골인 지점을 향해 달려가는 윷놀이처럼 살아왔다. 절대 서로의 등에 업히지 않고 의지하거나 도와달라고 하지 않고 각자의 길을 알아서 가는 것이 남매의 우애이자 의리였다. -pp147~148
- 이번엔 윷놀이다. 기가 맥힌다.
새언니의 메시지는 간단했다. 상의할 일이 있는데 점심시간에 회사 근처로 가도 되느냐는 것이었다. -p227
- 새언니의 문자로 소설이 시작된다.
송인문이 나타나지 않을 게 확실해진 뒤에도 인영은 깊이 잠들지 못했고 자주 깼다. 무언가 잘못되어 가고 있다는 불안함과 침묵으로 폭력을 인정하고 송영로에게 동조했다는 죄책감이 방의 구석구석과 그녀의 내부에 촘촘하게 거미줄을 드리웠다. 열심히 치우고 털어 내도 완전히 사라지지 않았다. 무심결에 방에 들어가거나 고개를 돌리는 순간에 여러 가닥의 거미줄이 미세하지만 확실하게 얼굴에 들러붙었다. 그 소름 끼치는 감촉이 얼굴에 번지면 인영은 눈을 감으며 숨을 몰아쉬었다. 그리고 해결되지 않는 감정을 떼어 내려 얼굴을 거칠게 문질렀다. -p247
- 알고 보니 가정 폭력 얘기다. 주인공 아빠가 쓰레기고, 그걸 보고 오빠도 쓰레기가 되었다. 오빠랑 결혼한 새언니가 보낸 문자가 소설의 첫 시작인 것이다. 내가 만약 가정 폭력을 주제로 소설을 쓴다면 어떻게 시작할까? 소설 첫 문장에 새언니를 둘 생각은 못 할 것 같은데, 신선해서 좋았다. 이렇게 써야 작가가 되는구나. 결말도 훌륭해다.
<우리가 말하지 않은 것>을 읽으면서는 카르마에 관해 생각했다. 집안 대대로 내려오는 카르마. 조부모님 때문에 부모님은 상처를 받고 이는 아이가 자라는데 영향을 준다. 우리 집도 마찬가지다. 아빠는 할아버지로부터, 할아버지는 증조할아버지, 증조할아버지는 고조할아버지로부터 아픔을 이어받았을 테다. 그렇게 만들어진 아빠의 불안과 분노는 그대로 나에게 전해졌다. 이제 내 대에서 끊어야 한다. 그래야 내 아이에게 물려주지 않을 수 있다. 나와 남편의 결핍이나 단점은 무엇일까? 그중에 아이한테 가면 안 되는 건 어떤 걸까? 그러려면 우리가 어떻게 바뀌어야 할까? 내내 고민하게 됐다.
한 장의 정원을 다 칠하고 나니 자정이 되었다. 밑에 조그맣게 날짜를 쓴 뒤 사진을 찍어 놓았다. 그 한 장이 어떤 때는 안녕의 기록처럼 가끔은 병상일지같이 느껴졌다. 병원과 약 대신 섬에서 지내기로 한 걸 후회하는 건 아니지만 이렇게 평면적이고 단조로운 밑그림을 원한 적은 없었다. 36색보다 열 배쯤 다채로운 색연필을 갖고 싶었다. -p275
- 주인공의 취미인 컬러링을 이렇게 연결 짓는다. 쓰면서 이런 문장을 생각해 내는 걸까, 애초에 이것부터 설정해 놓고 쓰는 걸까. 작가님의 주특기 같은데 미치도록 내 취향이다..
여자의 뒷모습을 보고 있으면 건너가서 맞은편에 앉아 같이 맥주를 마시고 싶은 충동이 일었다. 내 얘기가 아닌 것처럼 깨어진 결혼 생활과 미쳐 버린 진과 다른 사람을 만났던 반년의 시간에 대해 털어놓고 싶었다. 사랑은 아니었지만 보드를 타고 서핑하듯 아슬아슬하고 짜릿하게 균형을 유지하던 날들에 대해. 그런데 큰 파도에 보드가 뒤집히고 물에 빠졌다. 나와서 정신을 차려 보니 보드도 옆에서 타던 사람들도 보이지 않았다. 파도는 잦아들고 바람의 방향도 바뀌었다. 다시 보드를 타고 싶지는 않지만 발이 푹푹 빠지는 모래밭을 걸어 돌아가고 싶지도 않았다. 그게 진심이라고 말하고 싶었다. -p318
- 너무 외로울 땐 누군가에게 다 털어놓고 싶다. 안 친한 낯선 사람인데도 나를 다 보여주고 싶다. 나도 그럴 때가 있어서 공감됐다. 그리고 역시나 탁월한 비유.. 감탄이 나온다.
그러나 안도와 기대는 희박해서 나를 삶 쪽으로 끌어당기진 못했다. 다음 날 출근해서 일을 하고 밥을 먹고 동료들과 얘기하고 이러저러한 감정을 느끼고 돌아오는데도 삶의 테두리 바깥에서 세상과 다른 사람들의 인생을 구경하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버스를 타고 가며 차창으로 보는 풍경처럼 매일 같은 노선으로 다녀서 눈을 감고도 그릴 수 있을 것처럼 익숙한 거리인데도 지나가고 있을 뿐이라는 느낌을 지우기 힘들었다. 삶에 대한 접착력을 잃은 것 같았다. -pp320~321
- 나도 강남에서 혼자 살면서 일할 때 아주 비슷했다. 친구를 만나서 힙플레이스에 가고 실컷 재밌게 놀아도 오는 길은 너무나 공허했다. 우리나라에서 제일 비싼 동네에 사는데 한 번도 내가 그곳의 주민이라 느낀 적이 없다. 자격지심 때문인지 주변 사람들 사이에서 나만 다른 것 같았다. 직장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너무 외로워서 무교인데 교회 문 앞까지 간 적도 있다. 교회 사람들이 빵 나눠먹고 같이 김장하는 게 부러워서 끼고 싶었다.
얼마 전 서울에 갈 일이 있어 버스 타고 그곳을 지나가는데 기분이 묘했다. 3년을 살았으니 익숙한 동네인데도 여전히 어색했다. '집값이 비싸서? 누가 여기 공짜로 살게 해 주면 그땐 어떨 것 같아?' 나 자신에게 물어봤다. 대답은 '아니요'. 나는 아무리 돈이 많아도 두 번 다시 강남에 살고 싶지 않다. (아 물론 천지개벽해서 복권이라도 당첨되면 또 달라질 수도 있지만) 파리바게트랑 뚜레쥬르는 없고 아티제랑 곤트란쉐리에만 있는 동네엔 도저리 정이 안 간다.
분명 사계절을 다 지냈는데 강남을 떠올리면 추웠던 기억밖에 없다. 오래된 학교라 단열이 안 됐고, 차가 없어서 걸어 다니니까 겨울이 유독 시렸다. 그래서 계속 감기에 걸리고 방광염을 달고 살았다.
으으, 그 긴 이야기를 소설에선 한 문장으로 표현한다. '삶에 대한 접착력을 잃은 것 같았다'라고. 문학의 힘이다.
마지막 백수린 작가님 추천의 말도 정.말. 좋다. 서평은 이렇게 쓰는 거구나, 싶어 공책에 통째로 필사하려 한다.
서유미 작가님을 왜 이제 알았을까? 다행히 작품이 산더미처럼 쌓여있다. 요즘엔 가볍고 유쾌한 글만 찾기는 하는데, 진지해지고 싶을 때마다 하나씩 읽어야겠다. 글쓰기 공부하기 딱 좋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