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독서 기록

[독서기록] 돌봄과 작업

좀더 솔직하고 좀더 적나라하며 저마다 다른 기록들이 필요하다

by 화랑

다양한 직업군의 워킹맘들이 풀어주는 돌봄 이야기. 열한 명의 여성이 출산 및 육아가 그들의 삶을 얼마나 변화시켰는지, 그럼에도 어떻게 계속 작업을 이어가는지 허심탄회하게 털어놓는다.

처음 이 책을 알게 된 건 대전의 독립서점 버찌책방에서였다. 정서경 작가님 에세이가 궁금해 들춰보니 꽤 재밌었는데, 육아는 나와 관련 없는 일이니 사지 않고 그대로 내려놨다. 얼마 뒤 나는 한참 멀게 느껴졌던 그 영역에 불쑥 발을 들이게 됐고 곧바로 이 책이 떠올랐다. '임신'을 검색했을 때 나오는 태교나 육아 책엔 흥미가 없었기 때문이다. 임출육 동안에 나를 잃지 않고 자아실현을 할 수 있는지, 나만의 작업을 이어갈 수 있는지가 제일 궁금했다. 어쩐지 책을 산다면 다시 버찌책방으로 가야 할 것만 같았고 다행히 재고가 남아있었다.

계산대에 책을 올리자 책방지기님께서는 젊은 사람이 왜 이 책을 골랐냐며 조심스레 여쭤보셨다. 그렇게 시작한 대화가 내 얘기, 책방지기님 얘기로 이어지며 한참 길어졌다. 처음 만난 사이지만 따뜻하고 위로가 되었다. 알라딘에서 안 사고 책방에 가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소중했던 그날의 기억


읽어 보니 역시 정서경 작가님 부분은 기깔나게 좋았고,,, 그것만 따로 빼서 글을 썼다. 아래 링크.

https://brunch.co.kr/@hwarang-company/58


나머지도 다 인상 깊었다. 임신하고 읽으니 공감 백배 몰입 백배,,




서유미 / 시나리오 작가

노트와 펜, 노트북이 놓인 나의 테이블과 레고 상자와 브릭들이 흩어져 있던 두 사람의 테이블. 우리는 각자의 테이블 위에 놓인 것들을 열심히 만지작거리다가 시간 차를 두고 서로의 테이블을 바라보곤 했다. 남편이 브릭을 건네며 위치를 알려주면 아이는 그 자리에 꽂았고, 가끔은 각자의 연령대에 맞는 레고를 골라 완성해나갔다. 그러다 눈이 마주치면 아이는 엄마, 하며 손을 흔들었고 조금씩 형체를 갖춰가는 레고를 가리키며 자랑스러운 표정으로 웃곤 했다. 그런 주말이 여러번 지나갔다. 그때 만든 레고가 아이의 방 선반 위에 진열되어 있고 연재했던 소설은 책으로 출간되어 책장에 꽂혀있다. -p54

육아 희망편이다.


아이를 낳은 뒤 나는 줄곧 어떤 방향의 생각 쪽으로 끌려가지 않으려고 애썼다. 그것은 대부분 후회와 관련된 것이었고 들여다보면 검게 출렁였다. 시간이 많았다면 소설을 더 잘 쓰지 않았을까, 돌아보는 게 대표적이었는데 그 생각에 끌려가지 않으려고 버텼던 건 그게 진실이 아니라는 걸 내가 더 잘 알았기 때문이다. 결혼하지 않고 아이가 없던 시절에도 나는 게으르고 집중력이 부족했다. 그때 인생은 다른 방식으로 버겁고 복잡했고 나는 얄팍했다. 삶의 이력이 길어질수록 인생의 고통은 다양하고 인간의 삶은 복잡한 방식으로 불행하다는 걸 알게 되었다. 손톱 끝을 물어뜯게 만들던 문제가 해결되어도 인생은 꽃밭으로 변하지 않는다. -p55

나도 최근에 입덧과 환도 통증으로 고생하고, 출산과 육아만 상상하면 암담해져서 우울감이 심했다. 그때마다 '지금이 내 인생에서 가장 힘든 순간인가?'하고 물어봤다. 답은 '전혀 그렇지 않다'였다.

나는 십 대 시절이 유독 힘들었다. 매 순간 1등급, 1등에 집착하니 성적 압박이 극심했고 대학을 못 가면 인생이 끝나는 줄 알아서 하루하루 벼랑 끝에 매달린 기분이었다. 좋은 집에서 좋은 학원 다니고 부모님은 매번 라이딩해주시는데도 그 안에서 정서적인 만족감을 느끼지 못했다. 다 대학을 담보로 빚지는 조건부 호의 같았다. 지금 생각해 보면 고1~재수까지 정신병에 걸렸던 게 틀림없다. 실제로 재수학원 화장실에서 공황 장애 와서 헥헥거린 적도 있는데.. 굳이 떠올리기도 싫다.

대학교 땐 그보단 나았지만 내내 외로웠다. 자취방에서 신경숙-외딴방 읽으면서 오열한 기억이 생생하다. 임용고시 합격하고 강남에서 일하면서 혼자 살았던 최근 몇 년 간은.. 너무 자주 아팠다. 각종 염증을 달고 살았다.

정말이지 인생은 매번 다른 방식으로 버겁고, 이제 하나 해결했구나 하고 숨 돌리는 순간 예상치도 못한 신박한 고민거리를 들고 온다. 대학만 가면, 취업만 하면, 결혼만 하면 행복해질 거라 기대하는 내게 기다렸다는 듯이 뒤통수를 날린다.

그러니 생각을 전환해야 한다. 고통을 없애려고 하지 말고, 고통 안에서 즐기고 웃고 행복한 법을 배워야 한다. 내가 임신하지 않았다면 지금 행복했을까? 모르지. 그럼 또 다른 걸로 징징댔겠지. 그렇게 생각하면 마음이 편해진다.


시대나 사회의 분위기를 살펴보면 육아나 소설 쓰기에 투신하는 건 무모한 일처럼 보였다. ...(중략)... 외부의 시선으로 봤을 때 두 일은 모두 가성비가 안 좋은 일에 해당했다.

그 속에서 내가 찾은 해답은 시대적 분위기나 세상의 시선으로 봤을 때 이것이 괜찮은 일인지 내가 잘 해내고 있는지의 성과 여부에 대해 물을 것이 아니라, 소설을 쓰지 않으면 나는 행복할 것인가에 대해 물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중략)...

그럴 때면 나는 어쩔 수 없는 상태가 되었다. 아이와 누워서 장난치며 웃을 때, 아이가 통통한 손으로 내 목을 끌어안으며 '엄마가 참 좋아'라고 말하는 순간, 이 감정을 모르던 때로 돌아갈 수 없게 되었다. 그 사랑은 해일과도 같아서 모든 것을 쓸어가버렸다. -pp56~57

찡하다. 나도 한동안 비슷한 고민을 했다. 세상이 말하는 대세, 유망한 직종, 돈 버는 일을 해야 하는가? 돈이 안되더라도 내가 좋은 걸 해야 하는가? 좋아하는 일도 일이 되면 별로라던데.

내가 내린 답은 후자다. 내 잣대로 살기. 왜냐면 시대나 사회의 분위기는 언제든 바뀔 수 있기 때문이다. 거기에 따라서 결정을 하면 잘 안 됐을 때 후회되고 미련이 남는다. 그리고 남 탓을 하게 된다. 나의 경우 교직이 그랬다. 10년 만에 대추락하는 걸 보고 그냥 나 하고 싶은 거 할걸, 유망하지 않아도 내가 재밌는 학과 갈 걸 하고 많이 후회했다. 그러니 이젠 돈 안 돼도 나 좋은 대로 살기로 했다. 글 쓰고, 그림 그리고, 음악 듣고..

육아도 주변의 대세보다 내 마음을 따르고 싶은데 과연 그럴 수 있을지..


그러면서 아이만 자라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도 어떤 겹이 생겨나는 걸 느꼈다. 이것을 성장이라고 부를 수 있다면, 인간의 성장은 날개를 펴는 것처럼 자유로워지거나 꽃이 피듯 눈부신 방식으로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그저 어떤 일을 통과하면서 자신도 모르게 다른 곳에 도달하게 되는 일인 것 같다. ...(중략)...

그동안 나는 기꺼이 한 손으로 아이의 손을 잡고 다른 손으로 소설을 쓰며 시간 속을 걸어갈 것이다. -p59

이 책을 읽기 전까진 서유미 작가님에 대해 몰랐는데, 책 속 작가님 글이 충격적으로 좋았다. 다양한 직업을 가진 여성의 돌봄 에세이를 엮은 책에서 유독 시나리오 작가와 소설가의 글을 맘에 들어하는 걸 보면 나는 확실히 문학적인 문장을 좋아하나 보다. 서유미 작가님 글이 어찌나 인상 깊었는지 동네 도서관에서 작가님 책을 여러 개 빌려 읽는 중이다. 문장력이 탁월하고, 비유에 능하시다.


홍한별 / 번역가

아이가 어떻게 자라느냐를 전부 양육자의 책임으로 돌리는 메시지들이다. 광고에서, 대중문화에서, 윗세대 어른들에게서, 또래 아이를 키우는 다른 양육자들에게서 이런 메시지를 반복해서 들을수록, '양육자가 어떻게 하면 아이가 어떻게 된다.'는 명제들이 쌓일수록, 내가 잘못하는 일, 내가 마땅히 해야 하는데 하지 않는 일들의 수는 늘어갔다. -p72

오은영 선생님을 존경하지만 그분이 유명해지면서 육아의 관문이 더 높아졌다는 생각이 든다. 물론 긍정적인 부분도 있다. 출산과 육아에 따르는 책임이 강조된 건 좋다. 나 또한 무책임한 사람들 말고 물리적, 정서적으로 준비된 부모만 아이를 낳아야 한다고 생각하므로.. 그런데 뭐랄까 전국민적으로 양육 관련 지식수준이 높아지고, 그러다 보니 지나가는 양육자를 쉽게 탓하는 것 같다. 동시에 여러 진상 학부모들이 판을 치니까 엄마 입장에서는 이렇게 키우면 진상이고, 저렇게 키우면 오은영 선생님이 노하실 '비수용적' 부모가 되는 것 같아 진퇴양난에 빠진다. 감정을 받아줘도, 안 받아줘도 '맘충'이 되니 위축될 수밖에.. 부족한 부모로 손가락질받을 바엔 차라리 안 낳고 안 키우는 게 나아 보인다. 육아는 불완전할 수밖에 없고 누가 하든 어려운데 지금 우리 사회는 완벽을 요구한다. 감정은 받아주고, 상처는 주지 말고, 그러면서 버릇없게 키우면 안 된다고. '이게 맞다', '이건 틀리다', '이렇게 해라', '하지 마라' 정보와 조언이 판을 친다.

반면에 임신과 출산에 관한 정보는 거의 전무하다. 임신하고 보니 처음 겪는 고통이 너무 많고 난생 듣도보도 못한 변화를 겪는데 이건 어디서도 안 알려준 내용이다. 심지어 산부인과를 가도 명확히 설명해주지 않아 어쩔 수 없이 맘카페 선배들의 조언에 의존해야 한다. 아이를 어떻게 키워야 한다는 명제의 반만이라도, 임신과 출산에 관해 논의하는 게 어떨까. 오은영 조선미 선생님 다 좋은데, 아이의 심리 만큼이나 여성의 몸 / 엄마 본인에 집중하는 시간이 늘어나면 좋겠다.


임소연 / 과학기술학 연구자

과거의 나는 엄마를 혐오하는 여자였다. 나는 100퍼센트 헌신하는 일에 그들은 절반 정도만 발을 담그고 있었고, 신경이 온통 집에 있는 아이에게만 쏠린 것 같았다. 저 정도로 노력해서 성공할 수 있을까 싶은 의문이 들었지만, 어쩌면 나의 경쟁자가 한 명 사라졌으니 다행이다 싶기도 했다. 저럴 줄 모르고 아이를 낳았나 싶어 안타깝지도 않았다.

어쩌면 나는 그냥 여자를 혐오하는 여자였던 것 같다. '다른 여자와 다르다'는 말을 칭찬으로 들었고 평범하지 않은 여자의 삶을 살아야 한다고, 그렇게 살고 싶다고 생각했다. ...(중략)... 다른 엄마들과는 다르게 쿨하고 멋지게 살 줄 알았던 것 같다. 그러나 나라고 별 수 있나. 다를 거 하나 없는 엄마가 될 수밖에. 도리가 없었다. -p80

백번 공감한다.. 페미니즘을 하면서도 여자를 혐오했던 나. 그게 혐오인 줄도 몰랐다. 기혼 유자녀 여성을 비난하고 무시하면서도 여성 인권을 후퇴시키는 건 그들이지 절대 내가 아니라고 생각했다. 남편 밥 차려주고 아들 잘못 감싸는 여성을 속으로 얼마나 욕했는지. 이렇게 되니까 다 벌 받는 것 같다. 의도치 않게 임신하고, 그 아이가 아들인 건 마치 '너도 겪어봐라'라는 하늘의 뜻이 아닐지..


전유진 / 아티스트

앞으로 이 사회에서 출산과 육아의 과정이 이보다 건설적이려면, 우리가 듣지 못했던 것, 배우지 못했던 것에 대해 이전과는 다른 방식으로 말해야 한다. 좀더 솔직하고 좀더 적나라하며 저마다 다른 기록들이 필요하다. -p130

여기서 용기를 얻어 임신 일기를 브런치에 올리기 시작했다. 솔직하고, 적나라하고, 다른 임신 일기다. 남들이 어떻게 보든 중요하지 않다. 이런 기록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이설아 / 입양 지원 실천가

돌봄은 받는 사람이나 건네는 사람 모두를 똑같은 온도로 감싸안는 힘이 있다. 아이들과 속마음을 나누고 꼭 끌어안다 보면 내 성장기 중에 누려보지 못했던 섬세하고도 따뜻한 손길에 영혼을 맡기는 느낌이 든다. -p181

출산과 육아를 상상했을 때 유일하게 기대되는 점 중 하나다. 내가 아이를 돌보면서 나도 같이 포근해질 거라 믿는다. 누군가를 키우면서 나도 성장할 게 확실하다. 물론 그 과정은 시끄럽고 정신없고 혼란스럽겠지만..




임산부 / 아이 엄마 에게 백번 권하고 싶은 책이다. 아이도 좋지만 나도 신경 쓰자구요!! 돌봄과 작업2도 있어서 읽어 볼 계획이다.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독서기록] 돌봄과 작업 / 창작형 인간의 하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