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독서 기록

[독서기록] 김혼비 - 다정소감

by 화랑

요즘 시일 북스앤웍스에서 운영하는 <가장 사적인 글쓰기>에 참여 중이다. 일주일 1회, 글을 올리면 호스트(의성)님께서 읽고 피드백을 주시는 시스템! 온라인에서 만나 1시간 동안 글, 글쓰기, 작가가 되고 싶은 마음과 그러려면 필요한 것들에 관해 깊은 얘기를 나눈다. 잘 쓰기 위해선 많이 읽어야 한다는 말이 있는데, 의성 님 또한 좋은 글을 위해선 닮고 싶은 문체를 가진 작가의 책을 탐독할 것을 항상 강조하신다. 내가 에세이를 주로 쓰고 솔직하고 시원한 글투를 좋아하다보니 몇몇 작가를 추천해주셨고, 덕분에 처음으로 김혼비 작가 책을 읽게 되었다.

다정소감 / 김혼비 / 안온북스 / 2021


저 멀리서 관조했다면 사실 나 또한 그저 그런 생각으로 지나쳤을지 모른다. 편견을 갖기 쉬운 몇 가지 키워드에 의해 어떤 사람들이 '한 묶음'으로 정리돼버리면, 그 속에 제각각 다른 감정과 사연, 불가피한 사정과 한계가 있는 개별 인간들이 있다는 걸 떠올리기 힘들어지니까. 거기에다 실제로 '그런 사람들'이 질서를 어지럽히며 타인에게 피해를 준 사례가 추가되면 '안 그런 사람들'까지 '그런 사람들'로 한꺼번에 묶여버리기 쉬우니까.

하지만 조금 가까이에서 들여다본 묶음의 세계는 그렇게 단순하지 않았다. 오랜 세월 벼르고 별렀던 해외 여행이라는 커다란 감격이 있었고, 그 유명하다는 <모나리자>를 직접 눈으로 본 흥분이 있었고, <모나리자>에서 누구네 딸래미를 떠올리며 터뜨린 공유된 폭소도 있었다. <모나리자>가 별로였다는, 어떤 시작이 될는지도 모를 작은 취향이 비로소 만들어진 근사한 순간도 있었다. <밀로의 비너스>에 관해 미리 공부해 와서 친구들에게 조용조용 알려주는 사람도 있었고, 이름도 종류도 전혀 모른 채 그저 '예쁜 꽃' 앞에서 찍은 내 사진을 하나하나 짚어가며 꽃의 이름을 설명해주는 '꽃박사'도 있었고, 그 꽃박사는 "꽃에 관해 아무것도 모르면서 그저 예쁘다고 사진이나 한 장 박고 가는 게 전부"라며 나를 무시하지도 않았다. 저마다의 방식으로 여행의 매 순간을 통과하는 중이었다. 그들도 나도. (여행에 정답이 있나요/29)

- 어른들을 보는 작가의 시선이 좋았던 부분. 특히 꽃박사 얘기가 재밌었다.


"너도 할 수 있어. 너도 내 나이 돼봐. 그럼 이렇게 할 수 있다니까?"

(...)

철봉에 매달리지도 않았는데 갑자기 세상이 거꾸로 되었다. 축구공을 따라 뛰다 보니 시간은 거꾸로도 흘렀다. (거꾸로 인간들/37)

- '너도 내 나이 돼봐'가 이렇게 쓰일줄이야. 보통의 연장자들은 '젊을 때가 좋을 때다', '나이 먹으면 어쩌구 저쩌구'를 시전하는데 나 듣기 좋으라고 하는 말일지언정 썩 유익하진 않다. 내 나이를 치켜세워주면서 결국 신세한탄으로 이어지는 에고 토크,, 무엇보다 듣다보면 나까지 미래를 부정적으로 그리게 된다.

- 근데 작가와 축구하는 이 언니들은 정말 멋지다. 덕분에 희망이 생기고 나이듦을 기대하게 되잖아! 그리고 이 '거꾸로 인간들'이란 표현도 아주 신선하고 재밌다.


은희는 왜 맞서 싸우려 생각하지 못했을까? 또 나는 그전까지 왜 맞서 싸울 생각도 못한 걸까? 큰소리 내면 안 돼, 때리면 안 돼, 싸움은 나빠, 여자가 나대고 과격하면 못 써, 여자는 어차피 지게 되어 있어, 같은 것들만 잔뜩 배우고 '무례한 사람에게 웃으면서 화내는 방법'에만 도가 트느라, 고함치고 때리고 맞는 원초적 싸움에서 나를 주체로 놓아보지 못한 것이다. (축구와 집주인/49)

- 원초적 싸움에서 나를 주체로 놓아보지 못한 것,, 왜 나는 민원받이 공무원이 생각 날까 ㅎ.. 가마니가 되는 법에만 도가 트느라 맞서는 법을 까먹어버린,,


죽을 때까지 벗겨지지 않는 위선은 결국 선으로 세상에 남을 테니까. (56)

'쿨하다'가 한 시대의 정신으로 각광받으면서서 윤리적 노팬티가 패션인 양 포장되며 쏟아지는 무례한 독설들 (61)

그러니까 내 앞에서 저 사람이 떨고 있는 저 가식은, 아직은 도달하지 못한 저 사람의 미래인지도 모른다. (63)

그런 점에서 가식은 가장 속된 방식으로 품어보는 선한 꿈인 것 같다. (가식에 관하여/64)

- 새로운 시선으로 가식을 바라본다. 모순된 두 단어를 연달아 배치해 통념을 날카롭게 찌르는 문장을 읽으며 이런 것도 잘 쓰시네 감탄했다.


- 그러다 중간 부분은 살짝 집중이 잘 안 됐다. 저자가 어떤 확고한 신념을 갖고 독자를 설득하는 글은 내 취향이 아닌 듯하다. (이번에 확실해짐) 분명 맞는 말인데! 백번 공감하는데! 재미가 없다.

- 2부는 본격적으로 작가 주변에 따수운 사람들과 다정한 에피소드가 소개된다. 여기서부턴 너무 재밌어서 밑줄 벅벅 그으면서 읽음,, 마지막엔 살짝 울뻔함;;


그렇게 아이들이 엄마 손을 잡고 하나둘씩 사라지면 아무도 마중 오지 않은 몇몇 아이들이 체에 걸러진 알갱이처럼 현관 앞에 남겨졌다. (138)

그러고 나니 더욱더 드라마 등에서 챙김, 특히 '엄마의 챙김'을 받지 못해 쓸쓸하게'만' 그려지는 아이들을 볼 때마다, 그걸 보면서 엄마를 탓하는 사람들을 볼 때마다, 그걸 보고는 아이에게 미안해할 엄마들이 떠오를 때마다, 항변하고 싶었다. 전혀 쓸쓸하지 않았던 아이들 역시 많았다고. 우산 속 자리도 아늑했겠지만 우산 밖 빈자리가 우쭐했던 아이들도 분명 있었다고. 그 빈 자리를 스스로 채워가며 커간 아이들이 갖게 되는, 산성비도 부식시키지 못할 단단한 마음 같은 게 있다고. 설령 그렇지 않았던들 그건 엄마들만 미안해할 일이 절대 아니라고. 당시에는 어려서 사회가 '엄마'에게 소급해서 씌우는 책임의 무게를 잘 몰랐다. 뒤에서 수군거리는 어른들이 있다는 건 알았지만, 그런 어른들이 미디어에 '나쁜 엄마들'을 만들어내고, 우리의 존재를 지워버렸다는 건 잘 몰랐다. 그래서 제대로 말하지 못했고 그래서 한 번쯤 꼭 말하고 싶었다. 우리의 존재에 대해서. 그 시절을 우리가 어떻게 통과했는지에 대해서. 그런 우리들도 있었다고. 분명 있었다고. (그런 우리들이 있었다고/142-143)

- 엄마도 아이도 담백하게 위로하는 글. 나도 이런 글을 쓰고싶다. 가장 사적인 글쓰기에 참여하면서 내 글이 단문 위주라 내지르는 듯한 느낌이 든다는 평을 들었다. 맞춤법에 맞게 정확한 표현을 쓰는데 때로는 정석에서 벗어날 필요가 있다는 얘기도. 이 부분을 읽으며 그 말이 이해됐다. 문장이 길어도 괜찮다! 동어반복 좀 하면 어때!


외국 항공사에서 승무원으로 일했던 기간은 내 인생 전체를 놓고 보면 상대적으로 짧았고 집 앞에 등장한 비행기처럼 조금 느닷없었기에 앞뒤 기억들과 분리된 채 독립적으로, 말하자면 별책 부록처럼 내 안에 존재해왔다. 오랫동안 한쪽에 밀어두고만 있던 이 부록이 동네에서 비행기를 마주칠 때마다 아무 페이지나 대중없이 활짝 펼쳐졌고, 다른 페이지가 더 읽고 싶은 날에는 비행기가 나타나기를 기다리며 창문을 활짝 열어젖혔다. (146-147)

- 기가 맥힌다

그러다 문득 깨달았다. 어쩌면 이런 것들이 흔히 말하는 '연대'의 감각 아닐까. (...)

그들이 아니었으면 무사히 넘기지 못했을 날들. 내 생애 가장 '여초' 회사 였던 비행기 안에서 여자들끼리 익히고 배우고 나눴던 감각.

요즘은 비행기를 볼 때마다 이것에 대해 생각한다. 때로는 지치고 힘들어도 다른 여자들의 손을 빌리고 또 손이 되어주면서 우리가 계속 하늘을 날았다는 사실에 대해. 떠나간 여자들 뒤에 남은 이들은 어쨌거나 어디로든 계속 날아가야 하고, 서로의 비행을 응원하며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힘에 부쳐 주저앉아버린 순간에 문득 펼쳐볼 수 있는 다정한 기억들을 서로의 마음에 하나씩 쌓아 올리는 일인지도 모른다. 오늘도 비행기를 보면서 다정을 다짐했다. 비행기가 지나다니는 집이어서 다행이다. (비행기는 괜찮았어/152-153)

- 여자들끼리 서로 사랑하는 얘기는 언제나 재밌다. 별책부록으로 시작해 다정한 기억을 하나씩 쌓아 올리자는 비유가 좋았다.


하지만 거대한 농담이 하나 더 기다리고 있을 줄은 몰랐지. 다음 날, "본사에 신혼 여행의 추억이 깃든 소중한 물건이라 새것 대신 망가진 걸 그냥 받겠다는 고객님의 뜻을 전했더니 모두 크게 감동하셔서 정책상 사실 안 되지만 고객님의 물품과 함께 새 상품도 보내드리기로 결정하였습니다"라는 마시지가 온 것이다. 뭐라고? 그래서 지금 대형 사이즈 캐리어 두 개가 함께 올 거라고? 맙소사. 그 회사는 뭐 산신령이야? 지금 이거 금도끼 은도끼야? T는 정말 감사하다며 담당자에게 신경 써서 고른 기프티콘을 선물로 보내고 있었고, 저렇게 한쪽에서는 따뜻하고 아름다운 휴먼 드라마가 펼쳐지고 있는데, 낭만도 피도 눈물도 없지만 캐리어는 두 개나 갖게 된 미니멀리스트는 이걸 좋아해야 하는 건지 말아야 하는 건지 애매한 기분에 휩싸인 채로 머리를 싸맸다. 이게 뭐야! (어느 미니멀리스트의 시련/161-162)

- 어떻게 이렇게 웃기게 잘 쓸까? 난 이렇게 피식 웃게 되는 글을 좋아한다.


그날 저녁, 누군가 기숙사 방문을 두드렸다. 열어보니 K가 서 있었다. 박스에서 막 꺼낸 것 같은, 투명 비닐로 감싼 전자레인지를 들고서.

"나중에 나 주고 가면 되니까... 석 달이라도 행복했으면 좋겠어서." (뿌팟뽕커리의 기쁨과 슬픔/180)

- 이 글의 제목을 전자레인지로 했으면 어땠을까? 짧은 로맨스에 감동해버린 F인간.. 귀여운 소설 같은데 실화라니,,


신맛이 나며 산뜻한 커피를 마시고 싶을 때는 시카고 커피 브랜드인 '인텔리젠시아'의 원두를 고른다. 이름을 의역하면 '배우신 분'이라는 점이 약간 비웃김 포인트인데, 커피 맛에 살짝 섞여 있는 자두향이 입안에서 우엉 향으로 돌변하는 것도 코믹하게 느껴지는 유쾌한 커피다. (커피와 술, 코로나 시대의 운동/193)

- 커피를 안 마셔도 맛보고 싶어지는 묘사


저렇게 가장 게으른 방식으로 부지런할 수 있다니. 가장 한심한 방식으로 현명할 수 있다니. (제철음식 챙겨 먹기/199)


시간이 갈수록 그 눈빛들은 차곡차곡 내 눈 안으로도 들어와서 언젠가부터 나도 나를 그렇게 바라보기 시작했다. 그때 알았다. 그렇게 '누군가에게 성가시고 하찮은 존재'로 매일매일 규정되다 보면, 어느 순간 '누군가에게'라는 글자는 슬며시 사라지고 그저 '성가시고 하찮은 존재'로서의 나만 남는다는 것을. (205)

물론 이 모든 게 단번에 이뤄지진 않았다. 핏물을 빼는 데에 오랜 시간이 걸리듯이. 하지만 어느 날 정신을 차리고 보니 힘든 시기가 어느새 저 멀리 지나 있었다. 나는 지금도 그게 J의 '진짜 미친 사리곰탕면' 덕이라고 생각한다. 결코 내 것일 수 없다고 여겼던, 내가 소중하다는 감각과 나를 다시 이어준 한 끼의 식사. 어떤 음식은 기도다. 누군가를 위한, 간절한. (한 시절을 건너게 해준/211)

- 이 에피소드가 가장 좋았다. 찡하고 감동이고 따숩고,, 그래서 맨 마지막으로 간 게 아닐까 추측해보는..


그가 논리적으로 내린 참신한 결론은 대부분 내 시야를 넓히거나 아예 다른 곳을 보게 하는 통찰을 담고 있다. (추천사/223)

- 설득하는 글의 효용 같아서.


김혼비 작가님 다른 에세이도 읽어보고싶다! 일단 다음은 한수희 작가의 <무리하지 않는 선에서>를 읽으려고 빌려뒀다. 읽을 책이 산더미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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