숨길수록 선명해지는 결핍
"내가 가진 것이 곧 나라고 믿는다면,
그것을 잃는 순간 나는 누구인가?"
-에리히 프롬, 『소유냐 존재냐』 중에서-
사회생활의 초입에서 우리가 마주하는 가장 달콤한 함정은 '인정'이라는 이름의 보상이다. 처음 기획안이 통과되었을 때, 혹은 예상치 못한 성과를 거두었을 때 쏟아지는 찬사는 마취제와 같다. "역시 기대 이상이네요", "우리 팀에 꼭 필요한 인재입니다." 이런 문장들은 우리를 고양시키고, 내가 이 거대한 조직의 필수적인 유기체라는 착각을 심어준다. 사람은 자기가 가치 있다는 신호 하나만으로도 스스로를 소모할 준비를 마친다.
문제는 이 신호가 반복되는 순간, 더 이상 보상이 아닌 '기본값'으로 변질된다는 점이다. 어느 날부터인가 내가 해낸 탁월한 결과물은 특별한 뉴스가 되지 않는다. 어제는 박수를 받았던 성과가 오늘은 당연히 지켜야 할 기준선이 된다. 칭찬의 빈자리는 "다음 단계는 무엇인가요?"라는 서늘한 요구가 채운다. 우리는 더 이상 잘해서 칭찬받는 존재가 아니라, '당연한 것을 해내지 못하면 질책받는 존재'로 전락한다. 조직은 언제나 이런 방식으로 개인의 에너지를 추출한다.
작은 마을 우물에서 매일 물을 길어 나르는 당나귀 한 마리가 있었다. 처음 당나귀가 물통을 메고 나타났을 때 마을 사람들은 환호했다. 기특하다며 등을 다독였고, 때로는 신선한 여물을 내밀기도 했다. 그러나 당나귀의 성실함이 일상이 되자 감사는 증발했다. 사람들은 당나귀가 물을 가져오는 행위를 공기나 중력처럼 당연한 물리 법칙으로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비극은 당나귀가 지치거나 발을 헛디뎌 물이 조금 늦게 도착하는 날 발생한다. 사람들은 당나귀의 지난 노고를 기억하는 대신, 현재의 지연을 비난한다. "오늘은 왜 이리 늦어?", "제대로 일 안 할 거야?" 그 순간 당나귀는 깨닫는다. 자신이 대접받았던 것은 '당나귀라는 생명'이 아니라, '물을 운반하는 장치'로서의 성능이었다는 사실을.
우리 역시 사무실 책상 앞에서 이 당나귀와 같은 경로를 밟는다. 조직은 개인의 인격을 궁금해하지 않는다. 오직 소음 없이 출력물을 내보내는 기능적 무결성에만 관심이 있다. 칭찬은 자원이 들지만 요구는 즉각적인 생산성을 끌어낸다. 효율을 지상 과제로 삼는 조직이 칭찬을 아끼고 요구를 늘리는 것은 지극히 논리적인 결론이다.
인정이 고갈될 때, 인간은 기이한 방어기제를 가동한다. "난 남의 평가 따위 신경 안 써", "월급 받은 만큼만 기여하면 그만이지"라며 냉소적인 가면을 쓴다. 하지만 그 가면 뒤에는 여전히 나의 수고를 누군가 알아주길 바라는 유아적 갈망이 유령처럼 떠돈다. 이 갈증을 정면으로 마주하지 못하는 이들은 역설적으로 더 독하게 업무에 매달린다. 인정받지 못한 허기를 압도적인 성과로 보상받으려 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일종의 심리적 도박이다. 판돈을 키울수록 돌아오는 보상은 줄어들지만, 한 번만 더 터지면 모든 결핍이 해소될 것이라는 착각 속에 자신을 갈아 넣는다. 남들보다 한 시간 먼저 출근하고, 퇴근 후에도 메신저 알람에 신경을 곤두세우며, 완벽한 결과물을 위해 사생활을 지워나간다. 하지만 성과는 인정을 받기 위한 입장권일 뿐, 그 자체가 안도감을 주지는 못한다. 숫자가 올라갈수록 허기는 비례해서 커진다. 성취와 존재가 분리된 채 돌아가는 바퀴 위에서 우리는 점점 더 빨리 달릴 뿐이다.
모든 에너지를 쏟아부은 뒤 마주하는 저녁은 결코 개운하지 않다. 문을 열고 들어선 방 안에는 성취의 기쁨 대신, 누군가에게 철저히 사용되고 난 뒤의 서늘한 정적이 흐른다. 이는 마치 공연이 끝난 뒤 버려진 소품들이 널브러진 무대와 같다. 전원이 차단되었음에도 과열된 모터에서 뿜어져 나오는 메마른 열기처럼, 몸은 가만히 있어도 신경은 여전히 어딘가에 동기화 되어 팽팽하게 날이 서 있다.
수많은 직장인이 밤마다 마주하는 이 기이한 소외감의 정체는 무엇인가. 그것은 '나'라는 주체가 사라진 자리에 '성과'라는 박제된 결과물만 남았기 때문이다. 누구도 이 지독한 고립에 대해 먼저 말을 꺼내지 않는다. 인정욕구를 드러내는 것은 곧 패배를 인정하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허기는 부끄러워해야 할 결함이 아니라, 타인과 연결되고 싶어 하는 인간 본연의 생존 신호다. 우리는 이 신호를 너무 오랫동안 '성실'이라는 이름으로 억눌러왔다.
이제 우리는 타인의 칭찬이라는 배급품에 매달리는 짓을 멈춰야 한다. 당신이 아무리 정교하게 작동한다 해도, 조직은 당신의 내부에서 일어나는 균열을 보수해주지 않는다. 그들에게 당신은 교체 가능한 부품 중 하나일 뿐이다. 타인의 입에서 나오는 평가에 나의 가치를 외주 주는 일을 중단해야 한다.
진정한 해방은 누군가의 쓸모가 되기를 거부하는 고독에서 시작된다. 타인의 시선이라는 조명이 꺼진 무대 위에서, 아무도 나를 부르지 않는 진공의 시간 속에서 가만히 멈춰 서 보라. 성과라는 이름표를 떼어내고 남은 닳고 닳아 투명해진 당신의 실체를 직시하라. 당신은 증명되어야 할 과업이 아니라, 그저 살아있는 생명 그 자체다.
인정욕구의 허기는 타인의 박수 소리로 채울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타인의 기대를 배반할 용기를 가질 때, 그리고 그 빈자리를 스스로의 긍정으로 채울 때 비로소 가라앉는다. 숨길수록 선명해지는 이 결핍을 마주하는 용기만이 당신을 '사용되는 존재'에서 '존재하는 주체'로 되돌려 놓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