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근 후, 나는 왜 텅 비어버릴까

비어있음을 견디는 용기

by 권화린
인간은 자신이 가장 활기차게 활동한 시간만큼,
그에 비례하는 깊은 정적을 요구한다. -프리드리히 니체-


니체의 말은 현대인의 퇴근길을 관통하는 서늘한 예언이다.

회사 퇴근과 동시에 현관문을 열고 들어와 일상복으로 갈아입는 그 찰나의 무장해제는 나의 '사회적 자아'에서 '모성적 자아'로 교대 근무를 시작하는 순간이다. 앞치마를 두르고 학원 마치고 올 시간에 맞춰 중3 아들의 저녁상을 차린다. 보글보글 끓는 찌개 소리와 달그락 거리는 수저 소리가 집안을 채우고 아이가 배불리 먹고 일어난 자리에 남은 산더미 같은 설거지까지 끝내야만 나의 하루는 진정한 폐점을 선언한다. 곧장 욕실로 직행해 뜨거운 물을 틀어버린다. 보들보들한 잠옷으로 갈아입고 소파로 몸을 던졌을 때, 나는 비로소 무장해제 된다. 하지만 몸이 가벼워질수록 마음은 기묘하게 무거워진다. 분명 오늘 하루도 치열하게, 1인분의 몫을 다하며 살았는데 내 안은 마치 진공청소기가 빨아들인 듯 마냥 텅 비어버린다.



전력을 다해 비워낸 하루

사람들은 퇴근 후의 무기력을 패배라고 말하지만, 사실 그건 승전 후에 찾아오는 탈진에 가깝다. 직장에서 1인분의 몫을 해내고, 집에서 부모로서의 책임을 완수하는 과정에서 나는 단 한순간도 적당히 살지 않았다. 내 안의 에너지를 남김없이 쏟아부어 오늘이라는 성을 쌓아 올린 것이다.


텅 빈 느낌이 드는 건 내가 소모품이라서가 아니라, 오늘 하루에 내 모든 진심을 투여했기 때문이다. 나를 아끼지 않고 전력투구한 주체만이 느낄 수 있는 거룩한 고요다. 다만, 그 과정에서 '나'라는 주체는 잠시 뒷전으로 밀려나 있었을 뿐이다.



보복성 취침 미루기 : 잠들기 아까운 밤의 처절한 고집

가장 지독한 모순은 밤에 일어난다. 분명 눈꺼풀은 천근만근이고 내일 아침의 피곤함이 공포로 다가오는데, 왜 나는 이 무거운 몸을 이끌고 침대 위에서 숏츠와 릴스를 끝없이 넘기고 있는 걸까. 1분 남짓한 영상들을 탐닉하며 억지로 잠을 밀어내는 행위는 단순한 유희가 아니다.


이것은 나를 위한 보상적 집착이다. 하루 종일 '해야 하는 일들'에 전념하느라 잠시 미뤄두었던 '하고 싶은 마음'을 회복하려는 처절한 시도다. 무거워진 눈꺼풀을 억지로 올리며 영양가 없는 영상을 보는 그 시간은 역설적으로 내가 내 삶의 핸들을 쥐고 있다는 착각을 불러일으키며 유일한 해방구가 된다.



연결로부터의 자발적 고립

예전에는 새로운 곳으로 여행을 떠나거나 친구들을 만나 수다를 떠는 것이 충전이라고 믿었다. 하지만 이제는 그런 제안조차 폭력적으로 다가온다. 누군가를 만나기 위해 옷을 고르고, 표정을 관리하고, 대화의 맥락을 맞추는 일 자체가 또 다른 '연장 근무'처럼 느껴지기 때문이다.


현대인에게 진정한 휴식은 무언가를 더하는 '플러스'가 아니라, 모든 자극을 차단하는 '제로'에 가까울 것이다. 넷플릭스를 켜놓고 멍하니 화면을 응시하는 것은 작품이 훌륭해서가 아니다. 내가 반응하지 않아도 일방적으로 흘러가는 정보를 보며, '대응해야 하는 의무'로부터 해방되고 싶은 욕구의 반영이다. 여행이 귀찮아지고 사람이 피로해지는 건 내가 차가워진 것이 아니라, 내 안의 '사회적 배터리'가 임계점에 도달했다는 생존 신호다.



비어있음을 견디는 용기

퇴근 후의 무력감과 잠들지 못하는 고집은, 우리가 오늘 하루를 얼마나 성실하게 '소모'당했는지를 보여주는 훈장과도 같다. 텅 비어버린 느낌이 들 때, 우리는 억지로 무언가를 채우려 애쓰며 스스로를 다그친다. "왜 이렇게 의지가 약할까", "왜 생산적인 취미 하나 없을까"라며 말이다.


하지만 때로는 그 비어있음을 그대로 두는 것이 가장 정직한 회복법이다. 잠옷 차림으로 소파와 한 몸이 되어 의미 없는 영상을 보는 시간조차, 세상의 요구로부터 나를 격리하고 보호하는 소중한 의식이다. 텅 빈 그릇은 아무것도 없다는 뜻이기도 하지만, 무엇이든 다시 채울 수 있다는 가능성이기도 하니까 말이다. 오늘 밤, 억지로 잠을 청하지 않아도 좋다. 다만 그 고집 뒤에 숨겨진 나의 고단함을 한 번만이라도 있는 그대로 인정해주고 싶다.


비어 있다는 것은, 오늘 하루 누군가를 위해 내 안의 소중한 것들을 아낌없이 내어주었다는 가장 확실한 증거니까.




일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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