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임감이라는 이름의 연마지

성실함이라는 이름의 위장술

by 권화린
자신을 희생하는 사람은 자신의 내면을 텅 비게 만든다.
-프리드리히 니체-




내 이름표 위에는 늘 내가 선택하지 않은 무거운 수식어들이 먼저 도착해 있었다. 사람들은 나를 보고 책임감이 강하다고 말한다. 대개는 칭찬의 끝에 붙는 수식어지만, 내게는 그 말이 가끔 이름표를 잘못 달고 있는 사람처럼 생경하게 느껴진다. 이 책임감이 내가 기꺼이 선택한 성정인지, 아니면 너무 이른 계절에 강제로 입혀진 비대한 외투인지 구분되지 않아서다.




강요된 부력, 그리고 쓰러지지 않기 위한 추

처음의 책임은 나를 키우는 부력 같았다. 발이 닿지 않는 물속에서 살기 위해 허우적대다 보니 어느 순간 몸이 뜨는 법을 알게 된 것처럼. 강을 하나씩 건널 때마다 다음 강은 덜 두려워졌고, 나는 조금씩 '해낼 수 있는 사람'의 영토로 몸을 옮겼다. 하지만 어느 지점부터 책임은 나를 나아가게 하는 바람이 아니라, 쓰러지지 않게 눌러주는 추(錘)가 되었다. 방향은 묻지 않고 속도만 유지하는 기계적인 바퀴처럼, 나는 매일 성실이라는 이름으로 하루를 통과했다.


심리적으로 볼 때, 어린 시절 감당하기 어려운 역할을 떠맡은 아이는 '과잉 적응'의 상태에 놓인다. 나는 내가 완벽하게 기능할수록 주변이 안전해진다는 사실을 본능적으로 깨달았다. 기계가 소음 없이 돌아갈 때 그 부품의 안부를 묻지 않는 것처럼, 나의 성실함은 나를 지워나가는 과정이었다. 누군가의 세계를 매끄럽게 다듬기 위해 나라는 원석을 거칠게 문질러댔던 것이다.




작은 섬의 폭군과 숨죽인 울음

여섯 살에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우리 집은 내가 잠시 맡아두는 작은 섬이 되었다. 밤 열한 시가 되어서야 돌아오는 엄마를 기다리며 두 살 터울 동생 밥을 차리고 집안일을 거들던 날들. 사실 고백하자면 나는 속에 악마를 키우며 착한 아이 가면을 쓴 채 나 자신까지 속이며 살아온 시간이 더 길었다. 동생을 돌보는 일은 때로 버거워 짜증이 섞였고, 밥을 차리는 손길은 서툴러 엉망이었다. 그 분노를 동생에게 쏟아내는 동안, 어른이 없는 섬에서 나는 나도 모르게 작은 폭군이 되어 있었다. 그리고 문득 정신을 차리고 어린 동생을 끌어안고 엉엉 울던 날, 우리 남매의 머리 위로 형광등은 깜빡거리고 있었다.


그 어린 나이에 감당할 수 없는 역할임을 알면서도 빈자리를 채워야 한다는 예감은 본능처럼 선명했다. 외로운 섬의 밤은 칠흑 속에서도 일정한 파도가 쳤다. 현관문이 조심스럽게 열리는 소리, 하루를 다 소진하고 돌아온 엄마의 무거운 발걸음, 그리고 얇은 방문 너머로 새어 나오던 숨죽인 울음소리. 나는 그 소리를 모래 속에 묻듯 가만히 눌러두고 더 깊이 숨을 골랐다. 그때 나는 엄마의 슬픔을 위로하는 법을 배운 게 아니라, 내 서투름과 슬픔을 들키지 않는 법을 먼저 배웠다. 엄마의 세계가 무너지지 않게 내 부족함마저 납작하게 접어두어야 했다. 이것은 애정이라기보다 생존을 위한 투쟁이었다.





마모된 자아, 성실함이라는 위장술

책임감은 나를 닳게 만드는 연마지였다. 내 하루를 거칠게 문질러 누군가의 세계를 매끄럽게 다듬었다. 주변이 안정을 찾고 반짝일수록 나는 기뻤지만, 역설적으로 나라는 사람은 점점 얇아져 투명해지고 있었다. 책임감과 희생은 겉모습이 닮아 있지만, 본질은 다르다. 책임감이 내 중심을 축으로 회전하는 힘이라면, 희생은 중심이 빠진 채 돌아가는 관성이다. 이 차이를 구분하지 못해서 책임이라는 잘못된 이름표를 달고 어느새 나를 마모시키는 관성이 되어버린 것이다.


그래서 책임을 다하고 돌아온 날들의 끝은 유난히 서늘하다. 하루를 성실하게 살았는데 남아 있는 건 성취가 아니라 모든 연료를 태우고 검게 그을린 연소실 같은 허기다. 냉기가 도는 방 안에서도 열기가 채 식지 않은 기계의 쇠붙이처럼, 몸은 멈췄지만 나는 여전히 그 뜨거운 긴장 속에 갇혀있다. 나는 늘 '모두를 위한 선'을 기준을 두고 살아왔다. 그 선택들은 삶을 안정적으로 지탱해 주었지만, 동시에 나 자신은 항상 삶의 가장자리로 밀어냈다. 타인의 평온을 위해 나의 소란을 잠재우는 것이 익숙해질수록, 나는 나 자신에게 가장 낯선 사람이 되어갔다.





외투의 단추를 푸는 연습

요즘 나는 책임을 내려놓겠다고 말하는 대신, 그 외투를 다시 만져본다. 이건 정말 나를 키우는 무게인지, 아니면 아직 끝나지 않은 어린 시절의 반복인지. 책임은 언제나 미덕일 필요는 없다. 어떤 책임은 너무 오래 살아남은 생존의 흔적일 뿐이다. 완벽하지 못했던 어린 날의 나를 여전히 채근하는 몸의 기억처럼.


하지만 어느새 너무 크고 무거웠던 외투는 이제 내 몸집이 커지고 단단해지면서 결국 내가 선택해 걸칠 수 있는 옷이 되어 있었다. 나는 이제 책임을 지면서도 나를 남겨두는 연습을 한다. 책임이라는 외투를 입되, 그 안에서 숨이 막히지 않도록 단추 하나를 풀어둔다. 타인의 하루를 닦아주느라 얇아진 나를 위해, 아무도 부르지 않는 자리에서 가만히 멈춰 서 본다.


아마 나는 앞으로도 이 옷을 쉽게 벗어던지지는 못할 것이다. 그러나 이제는 안다. 책임이 나의 전부가 아니어도, 내가 완벽한 부품으로 작동하지 않아도, 나는 그저 여기 존재한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는 사실을. 마모된 이름표 대신, 이제는 닳지 않는 나의 이름을 가만히 불러본다.


나의 하루를 깎아내는 대신 이제는 나를 채우는 삶을 살기로 한다. 그것이 내가 이 긴 강을 건너온 끝에 도달한 가장 정직한 책임의 방식이니까.



일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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