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름 없는 나를 부르는 시간
"당신의 고독 속에 머무십시오.
그리고 당신의 내면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지켜보십시오."
- 라이너 마리아 릴케
완벽한 하루를 보내고 돌아온 저녁, 집 안의 불을 켜기 전 잠시 어둠 속에 잠겨 있으면 나는 가장 선명한 구멍을 마주한다.
이상한 일이다. 하루를 무사히, 아니 꽤 잘 마쳤다고 생각한 날일수록 그 구멍의 깊이는 더 아득하다. 아이와는 식탁에 앉아 다정하게 웃으며 대화를 나누었고, 회사에서는 업무와 갑작스러운 피드백을 차분히 매듭지었다. 어디 하나 삐걱거린 곳 없는 기계처럼 매끄러운 하루였다. 자책할 일도, 후회할 일도 없었는데 하루의 끝에 남겨진 것은 '잘 살았다'는 충만한 감각이 아니다. 그것은 언어로 설명하기 어려운 투명하고도 무거운 공백이다.
어느덧 중학교 3학년이 된 아이는 이제 엄마의 손을 먼저 낚아채지 않는다. 아이의 세계는 엄마라는 대륙을 떠나 자신만의 섬을 짓기 시작했다. 나는 그 섬의 해안선 근처를 서성이며 말을 고르는 법을 배운다. 덥석 묻고 싶지만 삼키고, 시시콜콜 알고 싶지만 아이가 먼저 입을 열 때까지 기다린다.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행하던 모든 개입을 멈추고, '지켜봐 주는 방식'으로 곁에 머물러야 하는 나이. 아이와 나 사이에는 같은 지붕 아래 있으면서도 서로 다른 우주가 흐른다. 아이가 제 방 문을 닫으면 나는 그 경계를 존중하며 함부로 손잡이를 돌리지 않는다. 매달림이 아니라 '나란함'에 가까운 거리를 유지하며, 각자의 고독을 지켜주는 법을 연습하는 중이다.
아이는 이제 엄마에게 굳이 애쓰지 않아도 된다고 말하는 듯하다. 구태여 많은 말을 쏟아내지 않아도 마음이 통하고, 조언보다 침묵이 더 큰 쉼표가 된다는 것을 안다. 그런데도 나는 이 평화로운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늘 한 발 앞서 나를 검열한다. 아이의 어깨에 내 삶의 불필요한 무게를 얹지 않기 위해, 나의 하루를 최대한 가볍게 증발시키는 습관들로 말이다.
퇴근 후 현관문 앞에 서면 나는 표정부터 고쳐 잡는다. 도어록 번호를 누르기 전, 짧은 숨과 함께 하루의 피로와 날 선 감정들을 문 밖에 가지런히 내려놓는다. 아이 앞에 설 때는 어깨의 짐을 다 풀어낸, 아무런 무장이 없는 맨몸으로 마주하고 싶기 때문이다. 날카로운 문장들은 입안에서 몇 번이고 식힌 뒤에야 내보낸다. 뜨겁게 달궈진 말은 아이의 마음을 데울 수도 있지만, 자칫 여린 하루를 태워버릴 수도 있다는 것을 안다. 저녁이 깊어질수록 나는 내 하루의 습기를 말린다. 다가가지도, 그렇다고 멀어지지도 않는 그 미묘하고 위태로운 균형대 위에서 발끝으로 서 있는 일. 이제 나에게 '좋은 엄마'란 화려한 다정함보다 지독하게 참아내는 인내에 가깝다.
반면, 회사에서의 나는 훨씬 더 단순한 개체로 전락한다. 이곳의 언어는 일정, 결과, 피드백뿐이다. 여기서 나는 고유한 서사를 가진 인간이 아니라 주어진 '역할'로 작동한다. 성과와 책임, 효율과 이익. 이 차가운 공간은 나의 개인적인 삶을 요구하지 않는다. 아이의 사춘기 고민이나 부모로서 느끼는 실존적 허무함이 들어갈 틈 따위는 없다. 내가 아이의 엄마라는 사실은 이곳에서 굳이 꺼내어 공유할 필요가 없는 건조한 정보다. 설명은 필요 이상의 노출이 되고, 이해는 결국 예외가 되어 돌아오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좋은 직원이 되기 위해 내 삶의 입체적인 면들을 아주 납작하게 접어둔다. 사람이 아니라 정교한 기능을 수행하는 부품에 가까운 모습으로 하루를 견딘다. 그렇게 나는 하루에도 수십 번씩 얼굴을 갈아 끼운다. 엄마의 얼굴에서 직원의 가면으로, 다시 직원의 태도에서 엄마의 침묵으로.
사람들은 이 상태를 '워킹맘의 고충'이라는 단어로 묶어버리곤 하지만, 그 말로는 이 소리 없는 마모를 다 설명할 수 없다. 이건 단순히 시간이 부족한 문제가 아니다. 이건 서로 다른 두 세계의 존재 방식을 동시에 유지하려는 한 인간의 실존적인 통증이다.
아이에게는 흔들리지 않는 어른으로 서 있고 싶고, 회사에서는 신뢰 가능한 구성원으로 남고 싶다. 두 세계를 오가는 사이, 엄마로서의 나도 직원으로서의 나도 각자의 자리에서 훌륭하게 작동한다. 겉으로 보기엔 아무런 고장 없는 완벽한 시스템이다. 하지만 진짜 문제는 그 정교한 시스템 사이에서 '나'라는 사람이 숨 쉴 곳이 사라진다는 공허함이다.
몸이 보서질 듯 피곤해서 나를 잃어버리는 게 아니다. 오히려 너무 잘 굴러가고 있기 때문에 나를 잊어버린 다. 소음 하나 없이 돌아가는 거대한 기계처럼, 어디 하나 삐걱거리지 않으니 점검할 필요조차 느끼지 못한 채 서서히 닳아가는 것이다. 나는 늘 '좋은 쪽'만을 선택하며 살아왔다. 아이에게 무리가 가지 않는 선택, 회사에 불편을 끼치지 않는 선택. 그 이타적인 선택들이 겹겹이 쌓여 지금의 안정을 만들어냈지만, 그 선택들의 가장 끝자락에는 늘 나 자신이 뒷전으로 밀려나 있었다. 타인의 평온을 위해 나의 소란을 잠재우는 것이 익숙해질수록, 나는 나 자신에게 가장 낯선 사람이 되어갔다.
그래서 요즘 나는 나를 되찾기 위해 거창한 혁명을 꿈꾸지 않는다. 다만, 꽉 짜인 일과 사이에 아주 사소한 '틈'을 내어주려 노력한다. 엄마의 의무도, 직원의 책임도 필요 없는 진공의 시간. 누구의 이름으로도 불리지 않는 상태로 가만히 앉아 있는 시간. 그 시간에 나는 무언가를 해내려 하지 않는다. 그저 내가 아직 여기 살아있다는 것을 글을 쓰며 확인해 볼 뿐이다.
이 상충하는 두 세계를 무너지지 않고 버텨내는 것 자체가 이미 대단한 일이라는 것을, 나는 이제야 인정한다. 이제 나는 좋은 엄마와 좋은 직원 사이를 그저 바쁘게 스쳐 지나가는 행인이 되지 않기로 한다. 그 사이의 좁고 위태로운 틈에 잠시 멈춰 서서 머무는 사람이 되어보려 한다. 아무도 나를 부르지 않는 고요한 자리에서 두 역할 사이에 가려진 이름 없는 나를 조용히 불러본다.
완벽한 역할 수행 뒤에 가려진 나의 비겁함과 외로움, 그리고 기어이 버텨낸 이 서글픈 생존의 기록들. 애써 채우려 했던 그 구멍조차 실은 빛이 들어오는 유일한 통로였음을 깨닫는다. 그 모든 균열과 애씀을 있는 그대로 응시하며, 오직 나로서 존재하는 이 고립된 순간을 지켜주기로 했다.